동독의 지휘벙커 동독의 지휘벙커 - 핵폭탄에도 끄떡없이 설계 통일 전 동독에는 안보기관의 벙커들이 전국에 산재했다. 전시에 국가를 지휘할 목적으로 베를린 북부 프렌덴(Prenden) 지역에 국가지휘벙커가 있었고 그 주변 지역에 통신지하벙커, 슈타지 지휘벙커, 국방부 지휘벙커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국가지휘벙커.. 독일분단극복 2006.09.13
고통의 터널은 희망의 전단계 고통의 터널은 희망의 전단계 - 통일조약에 경제지침서 담아 서독의 콜과 동독의 드메지어 총리가 서명한 통일조약 제1조 3항은 경제통합에 관한 규정으로 통일독일의 경제체제가 서독의 시장경제임을 선언한 조항이다. 시장경제의 본질을 의미하는 생산수단과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공식적으로 .. 독일분단극복 2006.09.07
동구권의 인권 릴레이 동구권의 인권 릴레이 - 인권헌장의 존재만으로도 희망이다 소련과 동유럽에 개혁의 바람이 불어닥치던 80년대 중반 동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1986년 몇몇 평화운동가와 주로 여성들이 중심이 된 평화와 인권을 지키는 모임(평인모)이다. 평인모는 교회의 울타리를 떠나 활동했던 동독 내 .. 독일분단극복 2006.09.03
서독 역대총리와 통일정책 서독 역대총리와 통일정책 - 콜, 동독 자유선거 성공시켜 통일기반 마련 초대총리 아데나워의 대외정책은 서방과의 관계정상화와 경제재건이었다. 동독 및 동유럽과의 관계는 관심 밖이었고 할슈타인 독트린을 중심으로한 강경노선을 견지했다. 할슈타인 원칙은 동독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국가.. 독일분단극복 2006.08.29
라이프치히 대학교회 폭파 라이프치히 대학교회 폭파 - 분신자살로 탄압에 항거하기도 분단 시절 동독사회는 당과 교회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렀다. 당은 교회를 사회주의 건설의 방해자로 간주했고 교회는 공산권력의 비정당성을 비판했다. 당의 창과 방패임을 자임했던 슈타지는 늘 교회탄압의 선봉에 섰고 권력에 맞섰던 .. 독일분단극복 2006.08.25
동독의 우민화, 빈곤화, 고령화 동독의 우민화, 빈곤화, 고령화 -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위기심화 재임 중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콜 총리는 서독기업에 불만이 많았다. 동독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던 기업인들이 시간이 흐르며 약속을 번복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동독재건이라는 또 하나의 숙제를 짊어지고 매년 약 700억 유로.. 독일분단극복 2006.08.18
1인당 하루에 25마르크 환전 1인당 하루에 25마르크 환전 - 강제환전, 주요 수입원 서독주민들의 동독방문은 분단 초기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동독에 직계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경우에 한해 방문이 허락되었고 방문기간도 년간 4주로 제한되었다. 또한 이들이 지참할 수 있는 선물에 대해서도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지.. 독일분단극복 2006.08.10
인권보호, 대동독정책의 핵심 인권보호, 대동독정책의 핵심 - 동독주민에 흘러간 현금이 동독변화 주도/ 불투명하고 정의롭지 못한 대북사업 실패 분단시절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 중 가장 부유한 나라로 알려져 왔다. 동독의 이런 명성 뒤에는 동독에 대한 서독의 끊임없는 지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지원은 몇 가지 원칙이 .. 독일분단극복 2006.08.07
숫자로 본 통일 10년 숫자로 본 통일 10년 - 동독주민 만족도 증가일로, 실업이 변수 분단 반세기 만에 독일은 통일을 맞이했다. 만성적인 결핍에 익숙했던 동독사회는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고 사회의 모든 영역이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 왔다. 독일이 통일 10주년을 맞아 실시했던 조사결과는 이런 변화의 내용들을 .. 독일분단극복 2006.07.29
독일통일과 유럽국가(2) 독일통일과 유럽국가(2) - 프랑스, 동독 자유선거에서 공산당 승리를 희망하기도 대처, 미테랑의 동의에 정신분열증세라고 독설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유럽연합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지만 회원국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네덜란드 루버스 총리는 “독일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라며 회원국 간 .. 독일분단극복 2006.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