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1인당 하루에 25마르크 환전

박상봉 박사 2006. 8. 10. 10:59
 

1인당 하루에 25마르크 환전

- 강제환전, 주요 수입원


서독주민들의 동독방문은 분단 초기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동독에 직계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경우에 한해 방문이 허락되었고 방문기간도 년간 4주로 제한되었다. 또한 이들이 지참할 수 있는 선물에 대해서도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지참할 수 있는 선물의 상한선이 정해졌고 그것도 1968년부터는 선물지참 허가명목으로 높은 수수료도 부과됐다.

1966년 12월에는 할슈타인 원칙을 지지하고 반동독 감정을 나타내는 서독인들에게는 동독 방문을 불허했으며 나치 파쇼정권의 잔재들을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이와 관계된 서독인의 여행을 금했다. 그리고 1968년 6월에는 공식적으로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인들에게 여권을 지참하고 출입국 비자를 받도록 했다. 또한 한나절 동베를린을 방문할 경우, 이에 해당되는 방문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렇듯 제한되었던 동독방문이 보다 광범위하게 확대된 것은 1972년 10월 17일 양독 간의 교류협정이 체결된 이후부터였다. 친척 뿐만 아니라 친지들에 대한 방문도 가능해졌으며 동독에 거주하는 친척들의 경조사가 있을 경우 이미 4주라고 하는 방문일수가 초과되어도 방문이 가능해졌다. 이런 일반적인 방문과는 달리 동독 상품전시장인 라이프치히 메세 방문이나 사업상의 체류나 공공단체가 초청한 경우에는 비자발급이 매우 용이했다.

이는 서독 기업인의 사업상 방문은 적지않은 경화수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동독경제는 분단 시절 이미 전세계 모든 나라와 무역을 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으나 동독 마르크화는 외환시장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사회주의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외환거래에 대한 규제가 광범위해 동독 마르크는 국내 지불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동독은 무역대금에 대한 경화결제수단이 필요했고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인을 포함한 비사회주의권 출신의 방문객으로부터 일정한 액수의 경화를 동독 마르크화와 교환토록 했다.


1964년 12월 1일을 기해 실시된 강제환전제도도 이런 동독의 경화수입을 위한 제도의 일환이었다. 동독을 방문하는 비사회주의권 국가의 방문객이나 서독인들은 도착 즉시 국가가 정한 은행창구를 통해 1인당 하루에 동독화폐 5 마르크(서베를린 거주자는 3 마르크)를 1:1의 환율로 환전해야 했다. 초기 5마르크로부터 시작된 환전규모는 이후 몇 차례 조정을 거친 후 1980년 10월 13일을 기해 25마르크로 인상된 후 통일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83년 9월부터는 동독 체류상한선도 년 4주에서 45일로 상향조정했다.

이에 따라 서독인 한 사람이 최장 45일을 동독에 머물 경우 최소 1,125 마르크를 1 : 1의 환율(시장환율, 서독 DM : 동독 DM = 1 : 4)로 환전해야 했고 환전한 동독 마르크는 체류 중 사용하고 남더라도 서독으로 가져올 수 없도록 했다. 환전을 강제화하고 돈도 체류 중 모든 돈을 사용토록 유도한 조치였다. 매년 수십만 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으니 이 사업도 포기할 수 없는 외화벌이의 일환이었다.

동독이나 북한이나 경화가 부족하기는 매 한가지다. 다만 이 부족분을 메워주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IUED

 

          

 

◇지난 89년 3월 19일 3명의 서독인이 5일간 동독을 방문하기 위해 총 375 마르크를 환전한 영수증 사본. 이후 8개월 만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어 강제환전제도도 마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