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라이프치히 대학교회 폭파

박상봉 박사 2006. 8. 25. 11:13
 

라이프치히 대학교회 폭파

- 분신자살로 탄압에 항거하기도


분단 시절 동독사회는 당과 교회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렀다. 당은 교회를 사회주의 건설의 방해자로 간주했고 교회는 공산권력의 비정당성을 비판했다. 당의 창과 방패임을 자임했던 슈타지는 늘 교회탄압의 선봉에 섰고 권력에 맞섰던 교회지도자들은 좌절과 무력감에 고통을 받아 왔다.

공산당의 교회탄압의 절정은 1968년 발터 울브라이트 당 총서기의 지령을 받아 라이프치히 대학교회를 폭파한 사건이었다. 울브라이트는 라이프치히를 대학의 중심도시이자 박람회의 중심지로 건설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고 이 구상을 실현하는 데 교회가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당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눈총을 받아오던 라이프치히 기독학생들을 방치하고는 당의 구상을 실현하기가 역부족이라는 판단이었다.

울브라이트 총서기는 당과 정치국 내에서 여러 반대의견에도 제기되었음에도 교회사나 건축사적으로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교회를 폭파하도록 명령했다. 1968년 5월 30일로 동독 교회사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긴 날이 되었다.


폭파는 철통 같은 경비 속에 진행됐고 당국은 도시전체를 완전 봉쇄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이런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증거자료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회 폭파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비밀리에 촬영되었고 동독 공산정권의 만행에 대한 증거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사건은 교회와 기독인들의 저항의식을 더욱 강하게 했고 폭파사건 이후에 구성된 몇몇 시민들의 모임은 제3회 바하 기념 콘테스트 기간 중에 폭파된 교회의 재건을 요구하며 교회의 복사본을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의 교회탄압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976년 8월 18일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동독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오스카 브뤼제비츠 목사가 공개적으로 분신자살을 한 것이었다.


1970년 41세의 나이에 작센 주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오스카는 당의 지속되는 반교회적 프로파간다(흑색선전)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당의 조직적인 방해공작(청소년 서약식 등)으로 교회를 떠난 청소년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모으는 일에 혼신을 다했던 오스카 목사는 슈타지의 경계 대상이었고 암암리의 방해와 감시가 이어졌다.

하지만 동독의 교회 지도부도 오스카를 위해 아무런 일을 하지 못했다. 오스카는 좌절했고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하고 말았다. 차이츠의 미하엘 교회 앞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산화하고 말았다.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슈타지의 야만스런 탄압을 만방에 알리려 했다. 이 사건으로 동독 교회는 또 한번의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그의 장례식장은 이런 만행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침묵시위장이 되어 버렸다. 이렇듯 교회를 탄압해왔던 동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의 공산정권도 이런 동독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IUED

 

                    

 


◇1976년 8월 18일 동독 공산당 울브라이트 총서기의 명령으로 폭파된 라이프치히 대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