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독일통일과 유럽국가

박상봉 박사 2006. 7. 12. 10:47
 

독일통일과 유럽국가(1)

- 베를린장벽 붕괴되자 주변국들 등돌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10년,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포한 지 9년 2개월이 지난 시점에 독일의 최대 시사주간지 ‘데어 슈피겔(Der Spiegel)’은 10년 전 숨가빴던 상황을 심층 취재해 보도했다. 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 사건은 독일인에게는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였지만 이를 바라보는 이웃 국가들은 차갑도록 냉담했다. 이웃국가들은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국의 국익을 저울질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에 대한 콜 총리의 비애는 국제정치의 현실이 얼마나 냉엄한지를 다시 한번 되뇌게 했다.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1990년 9월 12일 새벽 1시,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이 성급히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을 깨웠다. 모스크바 인터내셔널 호텔에 여장을 푼 베이커는 이미 수면제를 복용한 후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아침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전승국과 동서독이 회담을 갖고 독일통일 관련 조약을 마무리하는 최종 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대처 총리가 끈질기게 독일통일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동독의 나토 편입을 요구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어 겐셔가 급히 베이커 장관을 찾은 것이었다. 이 요구는 모스크바와의 충돌을 초래해 조약 자체를 물거품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베이커 장관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을 찾은 겐셔 장관에게 미국은 독일 편에 설 것이라고 약속했고 아침 회의는 미국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독일문제는 독일민족의 자율에 맡긴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통일을 이루기까지 서독정부는 수많은 현실적 난제들을 스스로 풀어나가야 했다. 서독외교가 전후 최대의 시험대에 서게 된 것이었다. 전후 수십년 간 나토와 유럽공동체를 위해 헌신해 왔다고 자부했던 서독은 유럽국가들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으나 현실은 달랐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주변국의 태도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무도 서독의 헌신적인 노력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런던, 파리, 헤이그, 로마의 정부가 각종 핑계과 구실을 제시하며 독일통일을 가로 막았다. 유일하게 미국만이 독일의 편에 섰다. 미국은 동독의 사태를 주시하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89년 봄에 이미 독일 주재 월터스 미국대사는 독일 땅에 통일의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독소 관계가 강화되는 한편,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배제될 가능성만 없다면 통일이 미국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콜 총리는 독일이 결코 미국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화답해 부시 대통령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통일을 위한 최초의 국제적 이해 조정이었다.

IUED

 

               

◇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독일의 미래를 결정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과 동서독 등 6자회담 참가국가. 이 회담이 독일통일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회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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