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베를린 천도

박상봉 박사 2006. 5. 27. 09:12
 

베를린 천도 

- 본은 서유럽, 베를린은 전체유럽의 중심


독일은 1949년 분단과 함께 임시수도를 본으로 옮겼다. 동베를린을 소련군이 점령하고 동독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민족은 동독에 자유가 주어지고 통일이 달성된다면 수도는 다시 베를린으로 환원한다고 전제를 달았다. 프로이센의 전통과 문화가 흠뻑 배어 있는 베를린을 떠난다는 것이 독일인들로서는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후르시초프의 최후통첩에도 굴하지 않았고 소련과 동독공산정권의 베를린 봉쇄조치에도 ‘공중다리’로 맞서 자유의 도시 베를린을 사수한 이유였다. 하지만 막상 통일이 이루어지자 수도이전은 통일된 독일사회의 가장 중요한 아젠다로 동서독 전 국민의 최대관심사였다. 여야를 초월한 공방이 치열했고 국민들 사이에도 베를린 수도이전을 둘러싼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본 지역 주민들은 거리로 뛰쳐 나와 이전불가를 외쳤다.


베를린 수도이전을 반대하는 의원들은 분단 시절 본(Bonn)이 임시수도로서 이루어낸 업적을 평가하며 “본은 전후 새로 시작된 독일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분단 시절 경제적 번영을 이루어낸 수도이다. 유럽 및 국제사회 교류의 중심지로서 탁월한 역할을 수행해냈으며 통일독일의 수도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반면 베를린은 시대적 암흑기인 나치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

수도 베를린 찬성론자들은 본은 임시수도에 불과하며 의회정치의 신뢰를 위해서도 초심으로 돌아가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통일독일은 서유럽의 중심지를 넘어 동유럽과 구 소련까지를 포함한 정치적·경제적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21세기 통일독일의 미래를 바라본다면 현재의 성과보다는 수도를 실질적으로 베를린으로 옮겨 통일독일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치열한 공방 속에 통일독일의 의회는 1991년 6월 20일 실시한 초당적 투표에서 338표 對 32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베를린 이전을 통과시켰다.


박빙인 가운데 겨우 베를린 이전이 통과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설득력 있게 독일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민련(FDP)의 기젤라 바벨의원은 “동독주민들은 동족이면서 잘못된 독재체제를 만나 자유와 복지를 갈취당하고 고통 속에 신음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자유와 통일의 희망을 놓지 않고 목숨걸고 자유를 찾아 탈출했고 무혈혁명을 통해 독재자를 추방하고 통일을 이루어낸 주역들이다. 우리는 이들의 과거의 고통과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통일의 주역이었던 볼프강 쇼이블레 기민련 원내총무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에 동독에서 편입된 신연방 5개주의 재건사업을 지원하고 냉전 이후 시대의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권을 통합해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를린 의회는 본에 베를린 중앙부처의 외청을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베를린에 위치할 필요가 없는 연방기구의 본 이전을 결의했다. 또한 수도이전으로 인한 손실보전을 위해 수도이전이 완료되는 2004년 말까지 수십억 마르크의 재정적 지원도 약속했다.

IUED

 

 

                

 

◇ 베를린 수도이전에 따라 베를린 슈프레 강변에 신축된 통일독일 총리실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