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국제스파이 맞교환

박상봉 박사 2006. 4. 20. 09:01
 

국제 스파이 맞교환

- 냉전 국제첩보전의 산 증거가 된 통일브리지


베를린 남부와 포츠담을 이어왔던 ‘글리니케 브리지(Glienicker Bruecke)’는 전통적으로 제후들이 베를린 사냥을 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목조교량이었다. 이것이 1907년에 철골구조를 갖춘 교량으로 건조되었고 1945년 2차 대전을 겪으며 폭파되었다. 폭파된 교량은 1949년 재건조되었고 ‘통일브리지(Bruecke der Einheit)'로 명명되게 되었다. 이후 통일브리지는 냉전의 상징이기도 했던 국제 스파이들의 교환장소로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에 널리 부각되게 되었다.

스파이들의 최초 교환은 냉전의 양대 산맥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첩보전으로부터 생겨났다. 소련의 거물 스파이였던 루돌프 아벨(Rudolf Abel)은 2차 대전 직후인 1948년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해 9년 간이나 스파이 행각을 해오다 1957년 체포되었다.

이런 가운데 1960년 5월 1일 소련 상공을 정찰비행하던 미군 첩보정찰기 ‘U2기’가 소련군에 의해 피격당해 추락하고 말았고 미군 조종사 게리 파워스(Gerry Powers)는 체포되었다. 이 두 스파이 사건은 미소 강대국들의 첩보전의 상징이었고 양대 정부는 국가를 위해 충성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그리고 1962년 2월 11일 아벨과 파워스는 나란히 통일 브리지 상대편에 나타나 최초의 맞교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이 다리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자유의 다리’라는 별칭이 붙었다.

 

두 번째 스파이 교환은 1985년 6월 11일에 이루어졌다. 서방세계에 수감 중이었던 4명의 스파이와 동독 공산정권에 의해 수감되어 있던 수감자 23명이 교환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폭발적인 언론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던 사건은 소련의 상징적인 반체제 인사였던 슈차란스키의 교환이었다. 그는 철권통치 하에서 조국을 배반하고 체제전복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인물로 당시 서방언론의 최대 주목을 받았다. 이로 이해 그는 통일 브리지를 넘는 날까지 숱한 소문을 뿌렸다. 스파이냐, 반체제 인사냐?, 스파이 교환은 언제냐? 등 그를 둘러싼 루머는 넘쳐흘렀다. 소련은 그를 스파이로 취급해 다른 스파이들과 교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미국은 슈차란스키와의 교환일을 아벨과 파워스의 교환이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2월 11일로 할 것을 주장했다. 2월 11일 다리 서방측에는 기자, 저널리스트, 사진작가 등 전세계 주요언론이 찾아와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친소 스파이 4명이 슈차란스키를 포함한 5명의 서방세계의 스파이 혐의자들과 교환되었다. 서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슈차란스키 이외에 변호사 포겔, 동독인 프론, 체코인 야보르스키, 서독인 니스트로이였으며 동독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소련의 컴퓨터 전문가 세미야코프, 폴란드 비밀경찰 카츠마렉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냉전시대의 첩보전이 국제적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화해·협력과 평화로 포장된 한반도에는 어떤 스파이 행각이 벌어지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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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브리지(Bruecke der Einheit), 일명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이 다리는 냉전시대 국제스파이들의 교환이 이루어진 다리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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