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동독의 몰락과 정치적 가격

박상봉 박사 2006. 2. 22. 12:16
 

동독의 몰락과 정치적 가격

- 제조원가 536 마르크를 16 마르크에 판매


동독경제가 과대평가되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동독이 통일 직후 경제적으로 급격히 붕괴되어 버린 이유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1999년 11월 15일자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이런 국민들의 의혹을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명확히 풀어주었다.

우선 슈피겔은 당 총서기 호네커의 아집과 무지, 당 간부들의 아부가 몰락을 재촉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는 80년대 초 이미 국가채무가 240억 마르크(서독)에 달했음에도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은 89년 말 당에서 축출된 호네커의 후임으로 총서기에 오른 크렌츠가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회담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두 정상의 회담을 기록한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호네커와 동독의 국가채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동독에는 부채와 같은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 대화가 중단되었다”라는 고르바초프의 발언내용이었다. 이처럼 호네커는 베일에 가린 채 현실에 대해 무지했다.


동독경제가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 또 한가지 이유는 수요 공급을 무시한 정치적 가격결정제도 때문이었다. 국가에 식용토끼를 납품해온 한 사육사는 “자신이 마리 당 60마르크에 납품했던 식용토끼가 도살, 가공처리된 후 15마르크의 가격이 매겨져 국영상점에 진열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독정부의 생산과 가격에 대한 개입은 더욱 심해졌고 몰락 직전 동독은 국가예산의 1/4을 이러한 왜곡된 구조를 유지하는 데 지출했다. 즉 통치자의 의지와 희망에 따라 물건이 만들어지고 가격이 매겨진 것이다. 인민회의 진더만(Sindermann) 의장의 손자가 ‘리바이스’ 청바지를 요구하면 이것이 정치국의 의제가 되었고 호네커가 동독제 256킬로바이트 마이크로 칩 생산을 주문하면 제조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개의 칩의 제조원가가 536마르크였음에도 불구하고 판매가격은 16마르크로 결정되었다.

결국 국가재정은 고갈되고 생산의 양과 질도 급격히 낙후되었다. 가계는 생필품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생산업자는 제조에 필요한 원자재의 품귀현상으로 공장가동을 멈춰야 했다. 주택을 구하는 데 5년이 걸렸고 전화는 10년을 기다려야 설치되었다. 동독 차였던 바르트부르그는 무려 15년이나 기다려야 차례가 왔다.


1988년 호네커가 공로가 있는 생산직 근로자에게 3백만 번째 신축주택을 하사하는 장면이 TV로 중계된 적이 있다. 이것 역시 거짓이었고 실제로는 그 시점까지의 주택건설은 2백만 호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소련은 1981년은 원유공급량을 1,900만t에서 1,700만t으로 줄인다고 통보해왔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소련이 외화벌이를 위해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호네커는 당시 브레즈네프 서기장에게 2백만t의 원유를 간곡히 요구했으나 브레즈네프는 “나도 이 문서에 서명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호네커는 “동독이 원유 2백만 t의 가치에도 못 미치느냐”고 반문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이 일이 있은 지 1년 후 동독은 국가지불불능 상태에 빠졌다. 서독으로부터 10억 마르크의 긴급차관이 주어졌으나 근본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은폐와 왜곡은 통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 기능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제기에 대한 슈피겔의 답변이었다.

IUED

 

                   

 

◇동독의 경제력을 상징하는 트라반트가 베를린 장벽을 부수는 장면이다. 통일은 이렇듯 풍요로움을 향한 동독인의 열망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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