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동독의 고르비, 샤보프스키

박상봉 박사 2006. 2. 14. 09:24

동독의 고르비, 샤보프스키

- 성난 시위대와 담판 유혈사태 막아


1989년 가을, 동독사회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체코 및 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으로 탈출한 동독주민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서독의 특별열차가 파견되었다. 헝가리 정부는 1989년 9월 11일 동독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對)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불과 2달이 채 안돼 이 루트로 2만4천명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해 서독으로 이주했다. 이런 와중에 한마디 실언(?)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인물이 바로 귄터 샤보프스키(Guenter Schabowski)였다.

그는 동베를린 사회주의 통일당(SED) 지부장 겸 당대변인이었다. 당시 당(黨)은 라이프치히 월요데모를 비롯한 전국에서 번져가고 있는 시위대가 요구했던 ‘자유로운 서독여행’을 어떤 형태로든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당 지도부는 서독 여행의 자유를 허가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그 시기를 11월 10일로 잠정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샤보프스키는 사정 상 회의에 불참, 정확한 날짜는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샤보프스키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당이 서독 여행을 허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이미 시위현장에는 “서독여행의 자유를 달라”라는 구호에 섞여 “공산독재 철폐”라는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샤보프스키는 11월 9일 기자회견을 열어  동독의 여행관련법 개정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이탈리아 기자가 즉흥적으로 “그 시기가 언제냐 ?”고 물었다. 샤보프스키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즉시(sofort)”라고 대답했다. 주민들이 너도 나도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결국 이 날이 28년간 지탱된 베를린 장벽의 무너져 내린 날이 되었다. 당 지도부는 샤보프스키가 동독에 사형선고를 내린 꼴이라며 맹비난했고 그는 후에 여행의 자유 때문에 체제가 붕괴할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호네커 후임자 에곤 크렌츠는 실각한 후였고 그에 대한 물리적 제재는 없었다.

러시아 여자와 결혼한 샤보프스키는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동독에도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동독의 고르바초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당 간부로서는 최초로 거리의 시위현장을 찾아 성난 시위대들과 대화를 시도했고, 재야단체들의 연합모임인 노이에스 포럼(Neues Forum)의 대표였던 생물학자 옌스 라이히(Jens Reich)와 물리학자 플루그바일(Pflugbeil)을 초청해 시국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등 재야세력을 인정하고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그는 구 공산세력들로부터는 ‘돼지’, 개혁주의자들로부터는 ‘쥐’, 국민들로부터는 ‘천의 얼굴을 가진 자’, 함께 기소된 자들로부터는 ‘겁쟁이’라는 좋지 못한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자의반 타의반 내린 결정들은 혼돈의 동독사회에서 유혈사태를 막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마무리하고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골수 공산주의자이자 당 선전책임자에서 개혁의 선봉자임을 자처하고 크렌츠가 당 간부들의 호화 거주지였던 반들릿츠(Wandlitz)를 떠나는 장면을 연출해내 국민들의 호감을 사기도 했다. 통일 후 그는 동독탈출자에 대한 사살 혐의로 조사를 받고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호네커를 비롯한 다른 당 간부들이 이런 혐의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했던 반면 샤보프스키는 사살사건에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1999년 12월 베를린의 한 감옥에 수감되었고 디프겐 시장의 사면조치로 2000년 10월 석방되어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북한의 고르바초프, 평양의 샤보프스키는 과연 누구일까 ?

IUED

 

                                  

 

◇귄터 샤보프스키. 동베를린 당대변인이었던 그는 베를린장벽 개방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1989년 11월 9일의 역사의 현장에 그의 행적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