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몰락을 재촉한 호네커의 자기도취

박상봉 박사 2006. 2. 9. 12:03
 

몰락을 재촉한 호네커의 자기 도취

- 탈출자 쇄도해도 체제유지 가능 착각


 - 1971년 당 총서기에 올라 1989년 몰락한 호네커.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그는 1929년 17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공산당에 입당해 1949년에는 인민회의 대표에 선출되었고 50년부터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약했다. 1961년에는 동서 분단의 상징이기도 했던 베를린 장벽건설의 총책을 맡았다. 1971년에는 사통당 제1서기에 선출돼 최고 권좌에 올랐으나 80년대 중반 소련 및 동유럽에 불어닥친 변화라고 하는 역사적 역풍을 맞으며 근 20년 간 유지했던 권력도 그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호네커의 몰락 과정도 다른 독재자들의 종말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자기도취’라는 특징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그는 동독탈출이나 소련과 동유럽에 불어닥쳤던 개혁의 물결을 ‘현실’로 바라보지 못했고 89년 10월 24일 건국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하던 고르바초프의 충고도 ‘자기도취’ 속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고르바초프는 "인생은 개혁에 늦는 자를 벌할 것이다"(Wer zu spae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라며 개혁을 주문했다. 


이런 자기도취는 89년 여름 절정을 이루었던 탈출자들에 대한 처리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호네커는 동독인의 탈출이 몇몇 불순분자들과 서독의 흑색선전에 의해서 조장된 것이라고 여기고 “동독은 배반자에게 어떤 동정의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서독정부가 체코 프라하나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탈출한 반역자들을 특별열차 편으로 동독 땅을 거쳐 서독으로 이송해도 좋다고 큰 소리를 쳤다.

이에 따라 89년 10월 1일과 10월 4일 프라하와 바르샤바 서독대사관으로 탈출한 동독인 6,800명과 7,600명이 두 차례에 걸쳐 서독 땅을 밟았다. 이 사건은 동독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고 수많은 동독인들이 달리는 특별열차에 몸을 던졌다. 특히 10월 4일에 출발한 특별열차에는 경찰의 사전 봉쇄로 드레스덴에서는 1953년 시민봉기 이래 최대의 인민저항이 전개됐다. 이 사건은 언론을 타고 전세계에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동독 내 반(反) 공산투쟁에 휘발유를 끼얹는 꼴이 되었다. 호네커는 이 사건 발생 후 한 달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렇듯 독재자의 말로는 현실에 대한 자기오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평소에 김일성을 존경해 수차례 북한을 방문, 그의 통치 스타일을 배우고자 했던 루마니아 차우체스쿠도 개혁 요구를 묵살한 채 인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비참한 최후를 맞으면서도 “나에게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를 불러달라”고 항변했다는 비아냥도 이런 독재자들의 오만과 자기도취적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김일성의 통치 스타일에 따라 루마니아 곳곳에 세웠던 자신의 동상도 독재자의 몰락과 함께 철거되고 말았다.

오늘날 이런 독재자들의 착각과 자기도취가 북한에서도 자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탈북민들을 방치하면 자신의 추종자들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착각, 입장료를 지불하며 다투어 방북하려는 인사들을 보며 “남한사람들은 북한 한번 방문하지 않고는 제 구실을 못한다”고 선전하는 착각, 미군 장갑차에 올라 성조기를 불태우고 주한미군 철수를 부르짖는 한총련 학생들을 보며 적화통일에 대한 착각, 부시가 김정일 보다 더 나쁘다는 젊은이들을 보며 핵개발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착각, 한반도의 정통성은 북한에 있다는 일부 친북 인사들을 보며 통일한국의 지도자를 꿈꾸는 자기도취, - 김정일, 그는 이런 착각과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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