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기적의 버스

박상봉 박사 2006. 2. 3. 08:55
 

기적의 버스(Wunderbus)

- 동독 정치범 구출 비밀계획 시행


20세기 초 구(舊)동독 드레스덴(작센州 수도)에서 북동쪽으로 50km 떨어진 바우첸(Bautzen)이란 지역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교도소 2 곳(바우첸 I & 바우첸 II)이 건립되었다. 이 교도소는 히틀러가 집권하던 나치시대에는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같은 정치적 적대세력들과 여호와 증인과 같은 反사회적 집단들을 수감했다.

동독 공산정권기에 바우첸I은 내무부의 관할이었고 재범자, 장기수와 함께 정치범이나 반사회범들이 주로 수감되었고 사용된 노란색 벽돌로 인해 ‘노란색의 저주’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에 반해 바우첸II는 슈타지(국가안전부) 교도소로 총수 밀케의 개인교도소라 불리며 동독 독재정권의 탄압을 상징했던 공포의 감옥이었다. 이 곳에서 슈타지는 반국가범들이 고문이나 잔인한 구타가 없이도 어떻게 무너져 가는가를 보여주었다.

수감자들의 공포의 대상은 ‘벙커’나 ‘호랑이장’으로 부르는 가로 2.5 m, 세로 1.5m 크기의 독방이다. 중범을 저지른 자들은 이곳에 격리 수용되었다. 물론 동독의 형법은 독방 구금일수를 21일로 제한하지만 교도관들은 22일째 하루 풀어준 후에 다시 이들을 격리 수용함으로써 법을 교묘히 피해가며 수감자들의 혼을 파괴했다.


슈타지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99년 5월 독일의 최대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동독 시절 유르겐 훅스, 루돌프 바로, 게룰프 판나흐 등 3명의 정치사범들이 백혈병을 앓아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당시 동독 슈타지가 교도소 내에 정치범들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사선기를 설치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그리고 당시 수감자 200명들의 관련 증언을 보도했다.

동독 내 정치범들의 실상을 접해왔던 서독정부는 60년대 초 서독 출판계의 거부 악셀 슈프링거의 참여 하에 동독 정치범 석방을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1963년 처음으로 전독성 관계자가 10만 DM가 든 가방을 들고 동베를린을 방문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64년 8월 분단 최초로 3대의 버스가 동독 정치범들을 태우고 헤어레스하우젠 국경을 통과 서독에 도착했다. 이 비밀 프로젝트는 ‘교회사업 B’로 명명되었고 개신교와 카톨릭이 전면에 나서서 일을 처리했다.

이를 시작으로 1989년 동독이 몰락할 때까지 총 3만1,755명의 정치범이 서독에 이주했으며 총 34억 DM의 비용이 들었다. 그러나 동독 비밀문건과 동독 외환관리책임자 알렉산더 슐라크-골로드코프스키의 진술에 따르면 서독의 정치범 석비용은 80억 마르크에 달했다. 석방비용도 초기에는 1인당 4만DM였으나 점점 인상돼 나중에는 9만5,847DM (한화 약 5,000만 원)나 들었다. 이 돈은 모두 슈타지 계좌로 입금되어 슐라크-골로드코프스키나 호네커의 계좌로 흘러들어갔다.


서독정부의 위임을 받아 동독에서 정치범들을 실어나른 버스기사 라이헤르트 씨는 당시의 비밀공작을 위해 국경을 넘나들 때마다 번호판을 바꾸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동독지역에서는 동베를린 번호판인 IA-48-32를 달았고 서독에서는 번호판을 HU-X3로 바꿨다고 한다. 당시 동독 수감자들은 파란색과 흰색으로 도색된 이 버스를 ‘기적의 버스’라고 불렀다.

통일 후 이 교도소들은 정치적 박해를 기리는 기념관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IUED

 

                     

 

◇ 바우첸Ⅱ(BautzenⅡ) 교도소 내부 모습. 이 교도소는 동독 공산독재정권 하에서 자행된 억압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