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동독군사력 처리 골머리

박상봉 박사 2006. 1. 31. 10:29
 

동독 군사력 처리 골머리

- 1백만 병력 성인남자 5명에 1명 꼴

   무기·탄약 55조원 규모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군복무를 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군에 자원 입대해 베를린의 한 포병부대에서 근무했다. 엥겔스는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다양한 이론서를 남겼고 특히 권력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피력했다. ‘무기의 힘’으로 상징되는 그의 권력관은 동독 공산주의자들의 교과서가 되어 동독의 군사아카데미는 엥겔스 군관학교가 되었고 국방에 획기적인 공을 세운 자에게는 프리드리히 엥겔스 상이 수여되기도 했으며 프리드리히 엥겔스라는 이름의 방위대도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는 이런 엥겔스의 권력관에 따라 소련군 점령지역 내에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착수했다. 슈피겔 지는 통일 후 당시 울브리히트의 동독 건설을 “나그네가 야밤에 달빛만을 의지하듯이 엥겔스의 권력의 본질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무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인민들의 수중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국가로서의 행정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행정조직은 민주적으로 그러나 모든 힘은 공산당의 수중에”라는 원칙을 지켰다. 이에 따라 동독은 건국으로부터 역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모든 권력은 사통당에 집중되어 있었고 통일된 독일에 두 가지 기록을 유산으로 남겼다.

첫째, 지구의 0.02%에 불과한 10만여㎡ 동독 땅에 무려 1백만 무장병력을 남겼다. 이것은 성인 남자 5명당 1명 꼴로 유럽 최대의 병력이었다. 둘째, 1천억 마르크(한화 55조원) 규모의 무기와 탄약을 남겼다.

국가안전부 슈타지 또한 권력의 핵심중추로 많은 무기와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규요원 9만2,000명과 비정규요원 17만2,000명을 거느린 슈타지 비밀조직은 수장에서부터 일반 말단요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무장했다. 슈타지 총수이자 무기광으로 알려진 밀케는 서방에서 수입한 권총 3자루와 24개의 사냥총을 사적으로 소지했으며 슈타지 내 식당요원과 간호사까지도 철저히 무장했다.


게다가 동독주둔 소련군의 병력과 화기도 공산당 권력의 든든한 후원세력이었다. 당시 소련군의 화력은 병력 36만5,000명, 전차 4,116대, 방탄차량 7,948대, 대포 3,578문, 전투기 623대, 헬리콥터 615대, 차량 9만4,129대와 탄약 67만7천t에 달했다. 이 사실은 1990년 서독 콜정부와 체결한 ‘동독 주둔 소련군 철수에 관한 협정’에서 밝혀졌다.

동독으로부터 과도한 화력을 떠 안은 통일독일은 동독군인들을 전역시키고 무기와 탄약에 대한 처리작업에 골머리를 앓았다. 일부 판매가 가능했던 무기와 탄약을 내다 팔았고 그 외 대부분의 무기들은 폐기했으며 첨단 미그 29기는 연방군에 편입시켰다. 또한 소련군의 군사무기와 병력은 통일과 함께 동독에서 철수키로 했다.

권력은 무기에 기초한다는 엥겔스의 권력관에 따라 소련군의 힘이 인민에게로 기울자 동독군이 동요해 슈타지를 해체하고 당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이 결국 독일통일을 열어준 꼴이 된 셈이다.

IUED

                       


 

◇전후 소련점령지역 내 공산주의 동독을 건설한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 그가 시작한 무기강국화로 통일독일은 많은 무기를 유산으로 떠안게 되었고 그 처리에 골치를 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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