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동독핵심층과 숲속마을

박상봉 박사 2006. 1. 21. 10:15
 

동독 핵심층과 ‘숲속마을’

- 특권층의 사치와 안락


통일 전 동베를린 근교 반들릿츠(Wandlitz) 지역에는 ‘숲속마을(Waldsiedlung)’이라는 별천지가 있었다. 현재 이곳은 브란덴부르크 주 요양기관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분단시절에는 당 고위간부들과 그 가족들만의 낙원이었다. ‘숲속마을’에는 안과 밖으로 분리되어 호네커 총서기, 슈토프 총리, 밀케 슈타지 총수 등 20여 명의 당 핵심간부들이 안쪽에, 차량기사, 요리사, 정원사, 세탁원, 수영장관리인 등 관리인들이 바깥쪽에 거주했다. 모든 설비는 ‘메이드인 저머니(made in germany)’였고 거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작은 모델을 이곳에 만들어놓은 것 같이 호화스러웠다.

일반적으로 동독 권력층의 삶은 일반인의 생활과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대략 3,000 여 명에 이르는 기득권층은 대부분이 별도의 별장과 외제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서방세계에서 수입한 물품이 가득한 특수상점을 이용했고 고위직일수록 서방의존도가 컸다. 호네커의 양복은 서독 최고급 백화점 카데베(KaDeWe)에서 구입한 것이었고 속옷은 명품 베아테 우제의 것이었다. 사냥용 차량은 메르체데스 벤츠와 로버 사 제품이었다.


특권층의 생활은 ‘사치’와 ‘안락’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생활이었다. 서방세계가 추구해온 가치인 자유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호화제품들이 사회주의적 가치를 폐허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이에 대해 재야인사 볼프 비어만은 “동독이 ‘썩은 노병’들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은 당 간부, 내일은 다시 생산현장으로’라는 이상도 구호뿐이었다.

동독의 핵심지도층은 생산노동자 출신들이었다. 권력서열 1위 호네커는 기와공이었고 슈토프는 미장공원이었다. 당의 창과 방패로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던 밀케는 화물기사 출신이고 당 외화벌이꾼 슐라크 골로드코프스키는 제과공이었다. 사통당 후신인 민사당을 창당하고 동독 공산당을 가까스로 건져냈던 기지는 소 사육사, 개혁공산주의자였던 모드로브 총리도 열쇠공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 노동자의 삶을 등진 채 권력을 만끽했다. 특히 이들 권력층의 호화로운 생활은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위에 군림했던 모습 속에서 더 잘 드러났다. ‘숲속마을’에 거주하던 641명은 오직 이들의 수족으로 충성을 다해 상관들을 섬겼다. 대학을 직접 운영했던 슈타지는 학위를 남발해 이 부서에만 485명의 박사학위 소지자가 있었다. 밀케는 박사 타이틀을 사용치 못하도록 했고 박사가 너무 많아 ‘마치 병원에 체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80년대 초 훔볼트 대학의 학생 중 노동자 출신이 10%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 당은 즉시 이 통계치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했다.

동독이 몰락할 상황에서도 고급관료들에게 213개의 금시계가 상납되었고 평균 64세나 되었던 핵심권력층은 마지막까지도 현실에 무감각했다. 호네커가 권력을 잃고 ‘숲속마을’을 떠나서 세상 밖을 산책하게 되었을 때 호네커 부부는 그들이 최초로 목격한 동독의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호네커는 자신이 몰락한 후 후임자였던 크렌츠에 대해 “에곤 크렌츠가 권좌에 오른 지 3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다“는 웃지 못할 명언을 남겼다. 이렇듯 동독 공산주의 권력은 이론과 실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다.

IUED

 

                 

 

◇별천지 ‘숲속마을’의 핵심권력층이 살고 있던 거주지에 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경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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