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유혈사태 막은 지휘자 마주어

박상봉 박사 2006. 1. 18. 10:08
 

유혈사태 막은 지휘자 마주어

- 도덕적 권위·명성 바탕 국민에 호소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 독일통일 전야제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를 연주해 동독과의 이별을 기쁨으로 노래했던 인물이다. 그는 베를린장벽 철거에 불을 당겼던 라이프치히 ‘월요데모’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89년 혼란기의 라이프치히는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고 통일은 더 큰 비용과 상처를 요구했을 것이다.

89년 10월 9일 월요일, 여느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거리에는 소위 ‘월요데모’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날 마주어는 자신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리차드 스트라우스의 ‘틸 오일렌슈피겔’을 연습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날 연습일정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니콜라이 교회 총감독 마기리우스로부터 이날 월요데모에 군대가 무력진압을 하게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마주어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당의 강경대응을 막지 못하면 라이프치히의 성난 군중과의 충돌로 피바다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제적 명성으로 동독의 당 지도부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는 점을 이용해 당 지도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당시 라이프찌히는 당 최고책임자가 수개월째 병환 중이어서 부책임자가 업무를 대행했다. 그는 소위 ‘시멘트머리(Betonkopf)’로 강경일변도의 인물이었다.

마주어는 그동안 사태의 전개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당 문화담당 마이어 비서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벌어질 최악의 사태를 막아보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마이어 비서와 동료들은 추가로 저명인사들을 이 일에 동참시킬 것을 요청했으며 신학자이지 기민련 정치인인 페터 찜머만과 예술인 랑게가 합류했다.

이들은 마주어의 거실에서 호소문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우선 교회로 달려가 성직자와 교인들에게 비폭력을 간곡히 부탁했다. 또한 많은 시민운동가들도 주민들에게 호소문 내용을 전달하고 이의 동참을 요구했다. 마주어의 호소는 라이프치히 라디오를 타고 거리거리에 울려 퍼졌다. 다행히 이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날 밤 시위대와 진압대원 사이에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군인들은 진압봉과 핼멧을 벗어버렸고 시위대의 절규는 대화로 승화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마주어의 도덕적 권위가 귀한 생명을 구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는 1970년 독일의 최고(最古)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게 된 이래 라이프치히 음악애호가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아왔다. 당이 자신을 홍보를 위해 이용하려 할 때에는 그는 스스로 ‘마티 루터의 조카’라 칭하며 당의 의도에 맞섰다.


폭풍이 예견됐던 다음날 시민운동가들은 마주어의 집으로 몰려가 담장을 꽃으로 장식했고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그를 노벨평화상에 추천했다. 당시 슈타지 보고서에도 이날의 유혈사태는 라디오를 통해 전해진 마주어의 호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은 그의 정계진출을 요구했고 기민련은 1993년 그를 연방대통령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주어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음악인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후 그는 뉴욕 필하모니의 지휘자도 겸임하는 영광을 얻어 동시에 두 개의 세계적 오케스트라를 맡은 최초의 지휘자가 되기도 했다.

IUED

 

 

                     


 

◇1989년 10월 9일 월요데모의 유혈사태를 막아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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