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재건

동서독 화폐통합 사례

박상봉 박사 2006. 1. 25. 10:12
 

남북경제통합6

화폐통합 관련 독일의 사례


1) 도이치 뱅크와 드레스드너 뱅크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동독경제 재건을 위한 금융기관의 역할 또한 다른 분야 못지 않게 큰 몫을 차지했다. 독일의 경우, 무엇보다도 연방은행이 이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일반 상업은행인 독일 최대 도이치 은행이나 드레스드너 은행도 동독 지역에 금융의 하부구조를 조성하고 금융 체계를 확립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실질적인 금융세계의 통합을 의미하는 화폐통합이 정치적 결단에 의해 이행됨에 따라 중앙은행으로서의 연방은행은 서독 마르크화의 공급 초과로 야기되는 인플레이션을 적절히 관리하여 서독 마르크화의 안정적 운영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결단은 당시 동독의 급격한 혼란 상황 속에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여론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동독상황에서는 “만약 서독의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 마르크에게로 간다. Wenn die D-Mark nicht zu uns kommt, kommen wir zur D-Mark” 라는 구호가 일반적이었고 실제로 40년이라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 참아온 동독주민들의 감정폭발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조절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특히 은행 차변과 대변에 대한 상이한 교환율을 적용함으로 해서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불균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차변금액이 많은 은행은 생존이 불가피해진 상황 속에서 이들에게 손실보전을 해주고 자문을 통하여 금융기관으로서의 틀을 마련하는 작업이야 말로 서독 은행들이 핵심적으로 추진한 일이다.

게다가 오랜 동안 사회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동독 주민들을 새로운 체제에 적응시키는 일 또한  은행의 몫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의 화폐의 의미를 새로 인식시켜야 했으며 동독 지역 금융인의 양성을 위해 각종 교육훈련도 실시해야 했다.


2) 화폐통합과 은행

동독인의 탈출사태가 점점 대형화되고 조직화 되어지는 와중에서 통일의 가능성을 확인한 콜 총리는 개혁 공산주의자 모드로프의 계약 공동체 제의 대신에 10개항에 달하는 통일방안을 발표한다. 89년 11월 28일자로 발표된 이 제안에는 최초로 동독 주민들에게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넓게 인정받고 있는 서독 마르크를 교환해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소위 ‘여행외환기금’이라는 명목으로 동독인들에게 서독으로의 여행을 가능케한 이 제도는 화폐통합을 위한 전 단계로 동서독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통화정책상 협력사업이었다.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이 협력사업은 화폐통합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금의 총 규모는 29억 마르크였으며 동독정부가 7억5천만 마르크 서독 정부가 21억 5천만 마르크를 부담하였다. 

동독주민들은 누구나 이 기금에서 200마르크를 유리한 조건으로 교환할 수 있었으며 100마르크는 1 : 1로 나머지 100마르크는 5:1의 환율로 교환하였다. 당시 시장환율이 8:1 정도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동독주민들에게 아주 유리한 조건이었다. 1천5백여 만명에 달하는 동독주민들이 이 제도를 통해서 서독 마르크화를 손에 쥐게 되었고 이 기금을 통해 교환된 규모는 총 50억 동독 마르크로 이 과정에서 21억 서독 마르크화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집계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점차적인 통화정책을 일원화하여 양독의 화폐를 단일화한다는 애초 계획은 급변하는 동독상황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90년 초부터는 화폐통합을 위한 양독 간의 협의가 서둘러 개최되었다.

협의 결과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표 5 : 동서독 화폐통합 시 적용환율


                  재산형태                           적용환율            비고

     -----------------------------------------------------------

                임금, 월금, 임대료                      1 : 1           

                연금 등 일상적인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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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금 (성인 1인당 6천 DM 限)            1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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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유현금 및 예금

                성인 1인당 6천 DM 초과금              2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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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재산                                3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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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독 내 재산                            2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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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설명 :

임금, 봉급, 임대료, 연금 등 일상적인 수입은 1 : 1의 환율을 적용해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한다.

․ 동독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 및 예금은 원칙적으로 2 : 1의 교환율로 교환된다.

   단 1인당 6천 DM까지는 1 : 1의 교환율의 적용을 받는다.

․ 1990년 12월 31일 이후의 교환율은 3 : 1 이다.


이 조치들의 경제적 영향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동독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되어 도산하는 사례가 늘어났으며 은행의 부실로 동독경제 활성화의 기초가 되어야할 금융시스템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동독지역에 불어닥치는 특수현상과 통화공급의 팽창은 물가상승의 요인이 되어 가뜩이나 어려운 동독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3) 금융시스템의 확립

동독의 은행제도는 국립은행(Staatsbank)이 중앙은행과 일반 시중은행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되어있었다. 즉 국립은행은 발권은행으로서 통화량의 계획과 통제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한편, 일반 상업은행으로서의 각종 업무도 담당하였다. 산업, 건축, 교역, 통신, 우편분야에 대한 금융업무를 직접 주관하였으며 심지어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여행용 외환을 판매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동독의 은행제도에 있어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조직을 갖추고 있던 기관은 마을금고이었다. 마을금고는 물론 제한적이기 하였지만 일반 민간인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동독에도 시중은행들이 활동하여왔다. 하지만 이 은행들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특별한 고객과 특수 업무만을 취급하였고 은행들 사이에 경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 은행들은 다양한 종류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범주에 속해있는 고객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수신과 여신 업무만을 담당하여 왔다.

화폐통합과 더불어 동독 은행제도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으며 일반 상업은행의 업무들이 동독 국립은행에서 분리되었고 구 동독 국립은행의 후신으로서 만들어진 베를린 국립은행은 1994년 9월 30일 서독의 재건신용기금(KfW)과 통합될 때까지 화폐교환 차액보전기금의 운영을 주로 담당하였다.

베를린 국립은행이 서독의 재건신용기금으로 통합된 것은 동독의 국립은행을 공공금융기관으로 전환시킨다는 통일조약에 따른 것이다. 재건신용기금에 포함된 동독 국립은행은 서독 연방에 새로 편입된 동독 신연방 5개주를 중심으로 경제활성화 지원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중소기업을 지원하여 시장경제 체제의 발판을 마련하는 일에 주력하였으며 구동독 시절 무참히 훼손되어진 환경을 되살리기 위한 활동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독 신연방 5개주에 새로운 체제에 걸맞는 은행제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작업들이 강력히 추진되었다.


첫째, 서독은행들의 활발한 참여

동독지역에 시장경제적 은행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독 일반상업은행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대적이었다.

일반 상업은행들의 참여는 무엇보다도 동독지역에 지점망을 확충하고 동독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존의 마을금고와 같은 금융기관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은행의 동독진출 사업에 경쟁적으로 활동한 두 은행은 서독 최대의 도이치 은행과 드레스드너 은행이다.  이 두 은행은 동서독 간 화폐 통합이 발효된 89년 7월 1일 이후 경쟁적으로 동독지역에 은행 지점망을 설치하여 고객을 확보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알프레드 헤어하우젠의 후임자로서 독일 최대은행을 대표하고 있는 힐머 코퍼 사장은 동독에 결정적인 사업들을 추진해왔다. 동독 국립은행의 관계자들과 끊임없는 접촉을 갖고 전문 금융인을 동독에 파견하여 도이치 뱅크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동독에 금융체계를 세우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이치 은행은 이러한 기초적인 작업을 통해 동독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통일 직후 동독 국립은행에 소속된 지점들을 도이치 신용은행과의 조인트벤추어로 무려 100여개를 인수하였다.

동독기업의 계좌는 거의 신용은행에 두고 있었던 반면, 동독 주민들의 개인구좌는 마을금고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초점은 이들에게 우리은행을 적극 홍보하여 마을금고 대신에 도이치 은행의 계좌를 개설하도록 하였다. 이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그 결과 이미 90년 통일 당시 도이치 은행에 25만개의 계좌가 개설되었던 것이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후인 91년 10말에 이미 75만명이 계좌를 개설하게 되었다. 드레스드너 은행은 91년 10월말 현재 130만명의 고객을 확보하였다.

1991년 10월말 현재 도이치 은행은 불과 1년 만에 250개의 지점을 설치하고 총 1만1천명의 고용인력을 확보했으며 드레스드너 은행은 216개의 지점망에 7천6백여명의 인력이 은행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코퍼 사장의 말처럼 제로 베이스에서 이루어낸 엄청난 실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종종 “우리가 시작할 당시 우리가 갖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신업무는 물론이고 여신 업무도 제로였다. 계좌 역시 제로였으며 그야 말로 제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라는 말을 되풀이하곤 하였다.


둘째, 자문과 교육훈련

지점망 확충 이외에 기존의 금융기관에 대한 자문활동과 금융인 확보를 위한 교육훈련도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었다.


   ● 다양한 금융상품에 대한 이해와 금융서비스

   ● 서독 마르크화에 근거한 기업 대차대조표 작성

동독지역의 회계업무는 서방국가의 업무와는 천차만별이었다. 대차대조표의 대변은 일반적으로 과대 평가되어 있었던 반면, 차변은 과소 평가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서 시장경제 체제에 걸맞는 금융인을 양성하는 것 또한 향후 동독경제의 활성화라는 측면을 물론이고 동독 내 발판을 구축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수순이었다.

동독의 은행제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금융기관인 ‘마을금고’에 대한 자문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이탈하는 고객들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셋째, 사회적 기여

동독지역에 가장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 이 두 은행은 동독의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서독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진 동독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공동으로 해결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상업은행의 입장에서 이를 통해 은행의 이미지도 높이고 고객을 더 많이 확보하겠다는 기업전략의 한 부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도이치 은행 알프레드 헤어하우젠 재단은 이미 1천1백5십만 마르크를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화폐통합 직후 여러 동독기업들은 커다란 유동자금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동독 기업들이 지니고 있던 은행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했으며 이들은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금융기관에 적응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유동성이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투자가 진행되었으며 은행이 제공한 자금을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채무보증은 당시 8천여개의 콤비나트와 인민기업을 관할하던 트로이한트가 지고있었다.)

게다가 도이치 은행은 독자적으로 동독 내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수백억 마르크를 대출해주었으며 트로이한트의 보증 하에도 수십억 마르크를 동독 내 기업활동을 위해 지원해 왔다.

수신업무도 활발히 추진되어 90년 화폐통합 직후 불과 3개월 만에 수십억 마르크의 예금고를 기록했으며 정기적금의 경우도 매일 500개의 새로운 가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독 주민들이 마을금고 보다 훨씬 유리한 금리로 예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상태임을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고정금리로 채권을 사는 주민들도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연방채권은 매우 인기가 높다. 결국 동독 내 금융사업의 문제가 예상외로 크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우리는 동독 지역에서 기금이 초과 수급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동독 은행체계에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마을 금고, 협동조합 및 신용금고에서 저축예금이 엄청나게 인출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 예금공백은 연방은행에 의해서 보충되어져야 했으며 서독의 일반은행들도 이 문제를 막기 위해 추가 차관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도이치 은행은 이런 식에 동참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자금확보는 정당한 조건에 따라 채워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이 자금들이 장기차관으로 활용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었다.


4) 동독기업의 누적 채무를 청산하라

동독기업의 전통적인 채무는 동독경제 활성화에 큰 장애요인이었다. 동독의 경우 금융권에 대한 기업채무는 기업의 생산성과 능력과 무관했다. 부채규모와 배정은 행정적 절차에 따른 결과였다. 기업은 모든 잉여금을 국고에 귀속시켜야 했으며 승인된 투자 프로젝트가 있을 경우만 잉여금의 일부를 기업이 보유할 수 있었다. 만약에 투자계획이 취소될 경우 기업은 투자금을 다시 국고에 다시 환수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자에 대해 기업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기업 적립금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단지 적립금과 유사한 종류의 기금 형태가 존재하긴 하였으나 그것 또한 중앙으로부터 기금조성, 규모, 사용, 이전 등 모든 과정에 대해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기업의 능률과 기금규모는 별개로 정해졌다.

통일 전후 금융협의회가 연방수상실에 마련되었다. 이 자리에서 코퍼 사장은 동독 내 많은 기업들이 안고 있는 산적한 채무를 해결하는 독자안을 내놓았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기업들의 모든 채무를 트로이한트로 이전시키고 공식적인 통일 후인 10월 3일 이후에 이 채무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자는 것이었다. 우선 총 1,300억 마르크에 달하는 채무가 은행권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비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400억 마르크에 해당하는 주택금융은 평균 40년 이상의 상환기간을 두고 은행권이 아닌 다른 곳에 유치시키고 동독 기업에 누적된 부채는 트로이한트에 이체해 동독재산을 처분한 자금을 동원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제안이다.

동독 내 자리잡기 위해서는 서비스 분야의 동독진출이 수월하다. 시설투자가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직면한 동유럽 국가들의 어려움은 동독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선 동독의 경우 서독의 막강한 전문인력들이 동독으로 파견되어 교육을 추진하고 전문가의 수준을 빠른 시일 내에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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