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공중파, 종이와 국경없는 신문

박상봉 박사 2006. 1. 4. 10:56
 

공중파 전쟁, ‘종이와 국경없는 신문’

- 동독인에게 자유세계 가치 전해


1949년 10월 동독이 건국됨에 따라 독일에는 2개의 서로 다른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서독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전승국들의 체제와 가치관을 대변했던 반면, 동독은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표방하였다. 이것은 본격적인 분단시대를 뜻했고 양 체제 간 가치와 사상적 충돌을 의미했다. 이런 가운데 미디어는 늘 중심에 있었고 독일 방송의 선구자였던 한스 브레도프(Hans Bredow)는 ‘공중파 전쟁’이라는 표현으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전파매체의 파워를 이해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사람은 레닌이었다. 그는 라디오를 ‘종이와 국경없는 신문’이라며 1924년부터 ‘라디오 모스크바(Radio Moskau)’에 외국어방송을 시작으로 1930년에는 50개의 방송국에서 58개 언어로 방송을 송출토록 했다.


서방세계도 대응을 했고 종종 윤리적, 도덕적 원칙들은 외면당했다. 소위 프로파간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1936년 국제연맹이 방송평화조약이라고 불리는 ‘평화를 위한 방송사용에 관한 국제조약’을 마련했으나 1940년까지 불과 13개국만이 이에 가입했다.

2차 대전 후 방송의 위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미소 강대국의 공중파 전쟁도 극을 달했다. 미국의 벤톤 상원의원은 1950년 미 의회에서 소련의 라디오를 통한 체제선전에 비해 무력하기 짝이 없던 미국사회를 향해 “이데올로기 영역에서도 마샬플랜을 구축해야 한다”며 “공산주의가 그 치명적인 독을 인류의 정신과 의식 그리고 감정에 흘려보내고 있다”며 전파매체를 통한 자유세계의 가치를 알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1953년 8월 1일 미정보국(USIA)이 창립된 것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와 각종 인쇄, 필름을 통해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 동유럽에서는 서방 자유세계의 정보매체에 대한 두려움이 커 수신 방해를 위한 방송국이 설립 운영되었다. 1959년 동유럽에서 총 2,600개의 방해방송국을 설립해 운영했다. 미소 초강대국의 이해가 갈렸던 독일에서의 상황은 더욱 치열했다. 소련 점령지역에 ‘도이칠란트젠더(DS;Deutschland Sender)’라는 방송국이 설립되었지만 서방 전승국의 대응은 그때까지 미흡하기 그지 없었다. 서독에 ‘도이칠란트젠더’에 대항하기 위한 ‘도이칠란트풍크(DLF; Deutschlandfunk)’가 설립된 것은 DS가 설립된 지 14년이 지난 후였다.

특히 베를린은 수십년 동안 냉전의 가장 뜨거운 장이었고 바로 그 한가운데 방송이 있었다. 베를린과 그 주변에 40개 이상의 라디오 방송, TV 방송 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군점령지역방송인 리아스(RIAS)는 동독주민들을 주 대상으로 한 방송이었다. 리아스에서는 동독인들에게 자유세계의 가치를 전했고 서방세계에서 일어나는 주요 정보들을 제공했다.

이러한 공중파 전쟁의 결과는 1989년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소련에 이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탈공산화 선언에 고무된 동독인들의 조직적인 탈출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자유와 풍요로움을 찾아 그들의 고향을 탈출하기 시작했고 서독은 자유세계의 품으로 모두 받아들였다. 분단이 극복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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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고, 리아스는 독이다.” 독일공산당 SED의 미군 리아스(RIAS) 방송에 대한 경고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