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서독 마르크화를 달라

박상봉 박사 2006. 1. 2. 10:43
 

서독 마르크화를 달라

- 고환율로 동독기업 생존 불가능


독일통일에 대한 경제적 측면의 평가는 동독의 혼란기에 동독인들이 외쳐댔던 구호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동독인들은 서독 자본주의 사회가 이루어낸 부(富)에 대한 동경이 매우 커졌다. 이들은 서독사회를 향해 “서독의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 마르크를 찾아 간다(Wenn die DM nicht zu uns kommt, kommen wir zur DM)”라며 경제적 번영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수많은 동독인들이 고향을 탈출해 무작정 서독행을 택했던 시대적 혼란기에 이러한 요구들은 동독인들의 대량이주를 초래할 수 있었다. 대동독 정책의 일부로 추진했던 화폐통합도 이런 정치적 현상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혼란과정 속에서 통일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콜 총리는 개혁을 표방하며 동독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려했던 개혁공산주의자 모드로브(Modrow)의 통일방안을 거부하고 89년 11월 28일 10개항에 달하는 통일방안을 역제의해 통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여기에는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인들에게 200마르크의 동독 화폐를 서독 마르크로 교환해 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환조건은 동독화폐 200마르크 중 100마르크는 1:1로 교환해주고 나머지 100마르크는 1:5의 환율로 교환해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시장환율이 1:8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동독인들에게는 커다란 선물이었으며 서독의 입장에서는 동독과의 통합을 위한 대가의 일부로 이해되었다.

총 1,500여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을 방문했고 서독정부는 총 21억 마르크를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독정부는 이 제도를 동서독 간 화폐통합을 위한 시금석으로 활용해 보다 구체적인 화폐통합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원안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동독의 무정부상태로 서독정부는 서둘러 화폐통합을 추진해야 했다.


이에 따라 1990년 7월 1일 화폐통합이 전격 단행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세부적으로 추진됐다.

▲화폐통합을 계기로 동독에도 서독 화폐가 도입되어 동서독에 유일한 화폐는 서독 마르크화다. ▲동독인들의 일상적 소득인 임금, 봉급, 장학금, 임대료, 연금 등은 1:1 환율을 적용해 서독화로 지급한다. ▲동독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과 예금재산은 2:1 환율을 원칙으로 서독 마르크화와 교환한다. 단, 1인당 동독화폐 4천 마르크까지는 1:1의 환율을 적용한다. ▲화폐교환은 동독 소재 금융기관의 계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동독 밖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재산은 특별 규정에 따른다.

동서독 마르크화의 시장환율이 1:8인 상황 속에서 이런 화폐통합의 조치는 경제적으로 매우 부정적이었다. 서독경제에 대한 부담도 컸지만 특히 동독기업에 끼친 악영향은 예상 밖으로 컸다. 고평가된 동독 마르크화로 인해 동독기업의 경쟁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통일 후 새로운 기업환경 속에서 많은 기업들이 생존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이런 후유증들은 통일의 과정에서 치러야 할 필연적인 것들이기는 하였지만 당시 서독정부는 정치적 이해에 급급해 추진했던 화폐통합의 부작용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IUED

  

             

 

            ◇1990년 5월 18일 화폐통합에 서명하는 동·서독 재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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