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차미는 거부

박상봉 박사 2005. 12. 28. 09:22
 

차(車)미는 거부(巨富)

- 최빈국 북한과의 통일준비는 근검절약으로부터


독일은 비록 동족 간의 전쟁은 아니었지만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일으켰던 국제적 전범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으며 살아왔다. 지난 1989년 말까지 동서독이 분단된 채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것도 이런 도발에 대한 응분의 결과였다. 장기간 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민족이라 독일인들은 질서의식이 잘 훈련되어 있고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10명이 모이지 않으면 성냥 한 개비도 켜지 않았다는 절약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독일인의 절약습관은 세계 제일이다.

우리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음식찌꺼기 문제도 독일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정은 물론이고 식당에서도 음식찌꺼기는 거의 발생하지 않으며 어린아이들은 유아시절부터 유아원에서 음식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성장한다. 음식을 남기지 않으니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새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일부러 음식을 남겨 주변에 뿌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분단시절 서독과 베를린을 연결하는 구간에서 보여줬던 서독인의 절약정신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일 전 동독 내 섬 도시이자 분단의 상징이기도 한 베를린과 서독지역을 연결하는 통행로는 세 군데에 불과했다. 베를린-함부르크, 베를린-하노버, 베를린-뉘른베르크를 연결하는 구간으로 서독인이 항공편을 제외하고 베를린을 방문할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이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최단 구간인 베를린-함부르크 만 해도 거의 200km 달하는 동독 영토를 지나야 했다. 이 때문에 서독에 파견되었던 한국 광부와 간호원 심지어 초기 유학생들도 이 동독구간을 지나는 동안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여권에 동독의 통행비자가 찍혀 밤새도록 이것을 지우려고 애썼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이 동독내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동독 국경수비대의 검문과 함께 당시 5마르크에 달했던 통행료도 지급해야 했다. 이로 인해 국경 검문소에는 늘 차례를 기다리는 차량들과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특히 여름철 휴가기간 중에는 100여 m에 달하는 줄이 늘어서는 것은 보통이었다.


줄선 차량 중에는 벤츠, 베엠베(BMW), 폴크스바겐, 아우디, 오펠에서부터 르노, 혼다 심지어 소련의 라다, 체코의 스코다의 차량도 가끔 눈에 띄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적인 사항은 운전자는 모두 차에서 내려 앞차가 검문소를 빠져나갈 때마다 차를 밀어 간격을 좁힌다는 점이었다. 굳이 환경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거부의 소박한 모습임에 틀림없다.

차량의 주차장 행렬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에 이를 정도로 정체되어있는 상태에서도 굳이 시동을 켜고 에어컨까지 작동시키며 불과 2, 3m의 틈을 채우는 우리의 모습과는 다르다. 졸부들의 기름 먹는 모습들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에너지를 마구 낭비해서가 아니다. 가난한 북한과의 통일을 준비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사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총 수출규모의 무역흑자를 내는 독일은 우리에 비해 거부(巨富)임에 틀림없다. 이 거부들의 차미는 모습 및 절약하는 생활습관이 분단을 극복하기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한사회와의 통일을 기대하고 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버림받고 살아가고 있고 북한의 아이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진흙바닥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들을 입에 넣고 있다. 이 지구상 최빈국의 북한과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사회에는 서독사회 보다도 더 근검절약하는 모습이 구석구석에 나타나야 한다.

IUED

 

           

 

◇ 동독 통행비자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서독의 차량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