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고르비(Gorbi), 우리에게 도움을

박상봉 박사 2005. 12. 9. 10:35
 

고르비(Gorbi), 우리에게 도움을

- 호네커, 40주년 행사 후 10일만에 축출


80년대 중반은 동유럽 사회주의권에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이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였고 동독사회는 89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탈출로 사회적 동요가 일고 있었다. 이 변혁의 시기에 호네커 총서기는 89년 10월 7일 건국 40주년을 예년과 같은 전시적 이벤트로 치르려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독재권력이 일반적으로 범하는 현실에 대한 오해와 왜곡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건국기념일을 앞두고 이미 몇몇 대도시를 중심으로 반공산당 시위가 일고 있었고 슈타지는 시위대를 무력진압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천명 이상이 체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는 40주년 행사를 성대히 치르고자 했고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축제 분위기가 식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소요사태를 예상한 SED(공산당)은 필요에 따라 무력을 행사할 준비도 해 놓았다. 그리고 전통에 따라 기념식과 건국축하행사를 계획대로 추진한다는 방침이었다.


10월 6일 자유독일청년단의 횃불행진에 이어 7일에는 당의 자랑스런 인민군대의 군사퍼레이드가 있었다. 서독과 서방자본주의 세계를 겨냥한 전시용 행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버팀목이 사라져갔고 거리에는 공산당 정권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축제 당일에도 칼마르크스 슈타트, 포츠담, 막데부르그, 플라우엔 및 라이프찌히 등 주요 도시에는 격렬한 시위가 있었고 권력유지에 혈안이 된 일부 당 지도부의 강제진압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 코 앞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벌인 대규모 시위는 당 지도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공식적인 건국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던 공화국 궁전 앞에 모인 시위대들은 “고르비(Gorbi 고르바초프의 애칭), 고르비!!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고르비는 동독인들의 이런 외침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의식 속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읽고 있었다. 그는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연설에서 사회주의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개혁을 이룬다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당과 인민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인 에너지를 한데 모아야 이루어낼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우리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기존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이야말로 우리에게 번영을 약속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연설 속에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 대통령의 역사인식이 담겨 있고 냉전이라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시대적 절박함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때까지도 시위대를 무력진압하고 사회주의 환상에 빠져있던 호네커에게 “인생은 늦게 참여하는 자를 벌할 것이다”라며 진심어린 충고도 해주었다. 결국 건국 40주년 행사는 사통당 정권의 마지막 ‘권력 시위’가 되었고 호네커는 이 행사 후 만 10일 만에 권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공산당이 주장해왔던 ‘당과 인민의 일치’라는 선전구호가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동독 건국 41주년은 동서독 통일기념일로 지키게 되었다.

IUED

 

                  

 

◇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