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기욤, 담배가게 주인에서 총리보좌관까지

박상봉 박사 2005. 12. 25. 13:28

 

기욤, 담배가게 주인에서 총리 보좌관까지

- 56년 위장탈출, 서독 정착

  총리실 비밀정보 동독에 제공, 브란트 사퇴

 

1974년 5월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연방총리에 오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전격 사퇴하고 말았다. 총리실 개인 보좌관으로 있던 귄터 기욤(Guenter Guillaume)이 동독 고정간첩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1927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기욤은 50년대 초반 동베를린 출판사 ‘인민과 지식'에 근무하며 슈타지 요원에 지원해 스파이 교육을 받았다. 51년에는 이미 슈타지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크리스텔과 결혼하였고 다음해 동독 공산당 사통당(SED)에 입당했다.

 

기욤은 56년 부인과 함께 슈타지의 지령에 따라 위장 탈출 서독으로 이주했다. 이들 부부는 정착지를 프랑크푸르트에 정하고 담배가게와 커피 하우스를 운영하며 지냈다. 또한 부인 크리스텔은 동독에서 비서직으로 일하던 경험을 살려 비서일을 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기욤 부부는 57년 사통당의 지령에 따라 사민당에 입당하였고 59년에는 부인이 헤센쥐드 지역의 당사무소에서 비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반면 기욤은 63년부터 68년 사이 프랑크푸르트 사민당 지부 사무국에서 일했고 68년부터는 시의회 사민당 사무총장과 프랑크푸르트 시의원으로 활동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욤은 교통부장관이었던 레버의 선거참모로 발탁됐다. 선거에서 성공한 레버 장관은 기욤을 연방총리실에 추천했고 이때부터 기욤의 스파이 행각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초기 신원조회도 무사히 통과한 기욤은 총리실에서 근무하며 주요 인사들과의 사교를 통해 신뢰를 꾸준히 쌓았다. 그는 총리실 내 경제·재정·사회정책을 담당했고 책임자를 거쳐 72년에는 브란트 총리의 개인 보좌역에 발탁되었다.

기욤은 총리실과 사민당의 실력자가 되었고 선거철에는 직접 브란트 총리를 수행하는 등 총리의 신임을 두텁게 쌓아갔다. 총리 주변에서 거하며 국가기밀과 총리의 대화내용까지도 접할 수 있었고 두터운 신임으로 총리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세세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브란트 총리가 노르웨이로 마지막 휴가를 떠난 기간 중에도 기욤은 총리실에 도착하는 총리 개인팩스를 빠짐없이 체크했다.

 

무려 18년간 벌여온 기욤 부부의 스파이 행각이 드러난 것은 체포되기 1년 전인 73년이다. 그 후 수사기관은 1년 이상 이들의 행각을 유심히 관찰했고 74년 4월 24일을 기해 이들을 전격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의 사퇴는 국가의 핵심부에 동독 고정간첩을 두었다는 국민들의 질타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생활까지도 낱낱이 정탐해온 스파이 기욤의 발각으로 동독이 브란트 총리에 대한 사생활 폭로전과 비방이 전개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1975년 12월 뒤셀도르프 법원은 국가기밀누설죄를 적용해 기욤에게는 13년, 부인에게는 8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들 부부는 복역 중인 1981년 동서독 간 이루어진 간첩의 상호교환으로 석방됐다.

 

동독에 도착한 기욤 부부는 ‘평화의 사절’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후 기욤은 스파이 교육요원으로 일하며 85년에는 포츠담 대학으로부터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는 공로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에는 ‘진술’이라는 제목의 인생여정을 책으로 출판했다. 무려 18년 동안 서독에서 활동하며 권력의 핵심부까지 진출했던 스파이였지만 기욤은 헌법질서를 지키기 위해 설립한 헌법재판소의 끈질긴 추적으로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IUED

 

            

 

        

      ◇ 동독 스파이 기욤은 브란트의 최측근으로 늘 그의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