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Jugendweihe(유겐트바이에), 청소년을 교회밖으로

박상봉 박사 2005. 12. 19. 09:18
 

Jugendweihe(유겐트바이에), 청소년을 교회 밖으로

- 서독교회의 지원으로 당의 통제 벗어난 동독교회

  유겐트바이에 참여자만큼 입교세례자 감소


분단시절 동독 공산당의 교회탄압은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1949년 동독건국 당시 전 동독인의 90%가 기독인이었으나 1990년 통일의 해에 남아있던 기독인은 24%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동독사회에 있어서 교회는 국가의 지배체제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기관으로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단순히 신앙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재야세력의 중심에 서서 늘 억압받는 자의 피난처가 되어왔으며 공산체제에 저항하던 동독의 재야인사들이 마지막 보루로 찾던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공산당 지도부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교회의 역할을 줄이고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도록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조치 중의 하나가 바로 유겐트바이에(Jugendweihe)라고 하는 청소년서약식이다. 이 행사는 일종의 성년식과 같은 형태였고 교회에서 성인이 되면 치르는 입교세례에 대한 대안으로 도입되었다. 실제로 이 행사가 도입되면서 세례입교자의 수가 줄었고 그 규모는 대략 유겐트바이에에 참여한 수와 비슷했다.


유겐트바이에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이 1953년 5월 동독 내 반소 정치성향을 우려해 취하도록 한 조치로 1954년 3월 동독 지도부에 의해 전격 도입되었다.

동독 공산당은 이 행사를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공식행사로 적극 추진했고 가족이 참여하는 가족축제의 형태로 발전시키며 유겐트바이에를 거부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조직적으로 배제시켰다. 그 결과 청소년들의 97%가 유겐트바이에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각 학교는 수요일 오후마다 이들의 청년활동을 조장시켰으며 이를 위해 숙제도 내주지 않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유겐트바이에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다음 것들을 서약하며 사회주의 정신을 배양하는 한편 교회로부터는 멀어져 갔다. ▲ 진실한 애국청년으로 소련과의 우호 강화 및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형제동맹 강화 ▲ 프로렐타리아 정신으로 무장 국제적 투쟁강화 ▲ 평화수호 ▲ 모든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사회주의 보호

동독 청년들의 머리는 이런 사회주의적 선언으로 가득 찼고 기독교 신앙은 점점 파괴되어졌다.


하지만 이런 조직적인 탄압에도 신앙의 본질을 지키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그 신앙심만큼이나 학교생활에 모범적이었으며 성실한 학생이었다. 이런 모습은 교사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도 감동을 주었고 신앙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또 하나의 밀알이 되어 동독사회 신앙의 뿌리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

물론 학생들의 신앙지키기는 동독교회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한 서독교회의 끈질긴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동독교회를 끊임없이 자문해 주었고 동서독 교회 지도자간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당의 교회 탄압을 막아냈으며 교회를 당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독립공간으로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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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독 공산당의 유겐트바이에 선전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