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비어 하벤 훼어로렌 (우리가 졌소)

박상봉 박사 2005. 12. 1. 12:01
 

비어 하벤 훼어로렌(우리가 졌소)

- 동독 지배계층, 역사적 대세 순응


20세기 인류역사의 최대 이슈를 불러일으킨 사건은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 체제가 종결되고 이런 흐름 속에서 동서독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동서독 통일은 동독인의 탈출에 콜(Kohl) 정부가 즉각적인 대응을 하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폴란드 등 주변국가들에 대한 서독정부의 긴밀한 외교에 기인한 바 크다. 또한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스스로 체제전환을 꾀했고 동독에 대해서도 개혁과 개방을 권유했을 뿐 아니라 동독 내에서도  자유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정치적 혼란기에 동독의 기득권층이 무력사용을 포기하고 통일의 흐름을 막지 않아 무혈혁명이 가능케 한 것이야말로 독일통일의 일등공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양 주재 동독의 마지막 대사였던 한스 마레츠키(Maretzki) 무혈혁명의 성공에 대해 “Wir haben verloren(우리가 졌소)”라는 말로 표현한다. 통일 전 동독 뿐 아니라 구 사회주의권 지도자들에 있어서 ‘냉전’은 실제 전쟁만큼이나 심각한 자본주의 사회와의 체제경쟁을 의미했다. 물리적 충돌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갈등과 충돌이 이어졌고 이런 상황 속에서 동독인의 탈출이 이어지고 그 결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것은 동독에게는 체제 경쟁에서의 실패를 의미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구 동독 지배계층은 당 간부, 군부와 슈타지, 외교관들이 주축이었다. 냉전에서 패하자 지배자들은 서서히 그들의 누려온 권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듯이 이들은 국제사회의 흐름에 민감했고 역사의 대세를 거역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알고 있었다. 구(舊)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과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전환과정들을 면밀히 주시했으며 대세를 거스르고 권력에 집착했던 루마니아 차우체스쿠 대통령의 말로를 관찰했을 것이다.


마레츠키는 이런 도도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동독내 무혈혁명을 설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통일을 이룬지 15년이 지났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는 끊이지 않는다. 풍요로움 뒤에 감춰져 있는 소외, 실업,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의식이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선두에 서서 이들을 정치세력화하려는 정당이 바로 민사당(PDS)이다.

민사당은 구(舊) 동독공산당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으로 서독지역에서의 지지기반은 극히 미미하지만 과거 동독지역에서는 평균 20%대의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이미 지난 1999년 동독지역의 튀링겐 州와 작센 州의회선거에서 민사당은 각각 21.4%와 22.2%의 지지율을 얻어 사민당(SPD)을 추월 제2당의 세를 과시하고 있다. 2002년에 치러진 메클렌부르그-포어폼메른 州와 작센-안할트 州의회선거에서도 민사당이 각각 16.4%와 20.0%를 기록할 정도로 동독의 향수를 자극하는 민사당의 전략은 맞아떨어지고 있다. 

지난 2005년 9.18선거에서는 민사당이 8.7%의 득표율을 기록해 1998년 5.1%의 득표율로 연방의회에 진출한 이후 다시 의회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구 동독지역에서의 지지율은 이미 25%에 달해 기민련(CDU)의 지지율을 주에 따라서는 앞선 곳도 있다. 이에 반해 서독에서의 지지율은 지난 선거에서 4.9%로 나타나 아직까지도 5%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몇몇 州에서는 민사당이 州 연정에 참여하고 있어 적어도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들의 주장이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 이 현상이 구 사회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서독사회에 대한 불만세력과 몇몇 체제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자들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책마다 이들의 의견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들은 세계 최고의 인건비 부담률을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시 막중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더욱이 고실업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동독지역으로의 투자에는 선뜻 나서지 않는다. 인건비도 저렴하고 온갖 혜택을 약속하는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지역을 외면할 수 없다.


이제 독일이 사는 길은 어떻게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고 분열된 사회갈등의 폭을 줄여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통일 그 자체보다 통일 이후가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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