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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주역: 금융인, 금융기관

박상봉 박사 2005. 12. 21. 15:29
 

독일통일의 주역 : 금융인, 금융기관

연방은행(Bundesbank), 도이치 뱅크(Dutsche Bank)과 드레스드너 뱅크(Dresdner Bank)


-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의 화폐의 의미를 새로 인식시켜야 했으며 동독 지역 금융인의 양성을 위해 각종 교육훈련도 실시


독일이 통일을 이루고 통일 후의 부작용과 혼란들을 수습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이 역사적 사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도록 노력한 인물이나 기관들을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분야는 금융 분야이다. 비록 상업은행들의 동독 진출과 참여가 자신들의 영업이익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고 이들 은행 역시 동독 진출 과정에서 이러한 회사 차원의 이익에 우선 순위를 부여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 금융인을 포함한 금융기관들의 역할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독일의 경우, 통일의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연방은행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상업은행인 독일 최대 도이치 은행이나 드레스드너 은행도 동독 지역에 금융의 하부구조를 조성하고 금융 체계를 확립해 나가는 일에 현장에서 기대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질적인 금융 체계의 통합을 의미하는 화폐통합(Währungseinheit)이 정치적 결단에 의해 이행됨에 따라 중앙은행으로서의 연방은행은 서독 마르크 화(貨)의 공급 초과로 야기되는 인플레이션을 적절히 관리하여 서독 마르크 화의 안정적 운영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결단은 당시 동독의 급격한 혼란 상황 속에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동독 상황에서는 “Wenn die D-Mark nicht zu uns kommt, kommen wir zur D-Mark 만약 서독의 마르크 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 마르크에게로 간다” 라는 구호가 사회 전체를 휩쓸었으며 그러한 험악한 상황 속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궁핍과 억압 속에서 지내온 동독 주민들에게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폭발 일보 직전의 감정들을 자제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서독 간 체결된 이와 같은 화폐통합의 후유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었고 이때 부터 금융계의 역할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문제점들과 과제들이 드러났지만 늘 정치적 사안들에 가리워 그 중요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였다. 우선 동독 은행들은 은행 차변과 대변의 항목에 차등적 교환율이 적용됨에 따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은행은 대차대조표 상의 불균형을 감수해야 하는 사례를 당해야 했다. 차변 금액이 상대적으로 많아진 은행은 생존이 어려워졌고 서독 은행들은 이들 동독계 은행들의 생존을 위해 그에 대한 손실 보전 및 자문을 해주어 새로운 체제에 걸맞는 금융기관으로서의 틀을 마련하도록 지원해야 했다.

게다가 오랜 동안 사회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동독 주민들을 새로운 체제에 적응시키는 일 또한 은행이 담당해야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의 화폐의 의미를 새로 인식시켜야 했으며 동독 지역 금융인의 양성을 위해 각종 교육훈련도 실시해야 했다.



화폐통합과 은행


-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된 동독 마르크 화로 인해 동독 기업의 경쟁력은 더욱 악화되었고 많은 기업들이 새로운 체제 속에서 더 이상 생존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은행의 부실화로 동독 경제 재건의 기초가 되어야할 금융 시스템 마저도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동독 탈출 사태가 점점 대형화되고 조직화 되어지는 가운데 통일의 가능성을 확인한 콜 총리는 동독 공산당 지도부가 사태 해결을 위해 서둘러 임명한 개혁 공산주의자 모드로브(Modrow)가 제의한 계약 공동체를 거부하고 10개항에 달하는 통일 방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89년 11월 28일자로 발표된 이 10개항의 제안 중에는 동독인들에게 서독 마르크 화를 교환해 주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내용은 동독 주민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최초로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넓게 인정받고 있는 서독 마르크가 동독인들의 손에 주어져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서독 정부는 소위 ‘여행외환기금’을 조성하였고 동독인들은 일정한 양을 서독 마르크 화로 교환하여 서독으로의 여행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 기금의 총규모는 29억 DM였으며 동독정부가 7억5천만 DM 서독 정부가 21억 5천만 마르크를 부담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비교적으로 성공적으로 평가되었을 뿐 아니라 화폐통합이 시행되기 이전 단계에서 동․서독이 이끌어낸 최초의 통화 정책적 협력 사업이었다.  


동독 주민들은 누구나 이 기금에서 200 동독DM를 유리한 조건으로 서독 화폐와 교환할 수 있었다.  교환 조건은 우선 100 DM는 1 : 1로 교환해주고 나머지 100 DM는 1 : 5의 환율로 교환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당시 시장 환율이 1 : 8 정도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동독 주민들에게는 대단히 커다란 선물이었으며 서독 정부의 입장에서는 동독과의 통합을 위한 댓가의 일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총1,500여 만명에 달하는 동독 주민들이 이 여행 외환 기금을 통해 서독의 경화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 제도를 통해 교환된 통화 규모는 동독 화폐로 총 50억 마르크에 달한 바 있다. 이를 위해 서독은 21억 마르크를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서독 정부는 이 제도를 궁극적인 동서독 간 화폐통합을 위한 시금석으로 활용하려 하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보다 구체적인 통화 통합의 대비책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원안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동독 사회의 붕괴 조짐으로 서독 정부는 서둘러 화폐통합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게 되었다. 우선 양독 마르크 화의 통합은 90년 7월 1일자를 기해 전격적으로 단행한다고 결정하였고 통화 단일화를 위한 주요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이 합의 하였다.


        ▲ 임금, 봉급, 임대료, 연금 등의 환율은 1 : 1로 한다.

        ▲ 동독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 및 예금은 원칙적으로 2 : 1의 교환율로 교환된다.

           단 1인당 4천마르크까지는 1 : 1의 교환율의 적용을 받는다.

        ▲ 1989년 12월 31일 이후의 교환율은 3 : 1 이다.


이러한 화폐통합 조치는 경제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들이었다. 서독 경제의 부담도 적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동독 기업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예상 밖으로 컸다.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된 동독 마르크 화로 인해 동독 기업의 경쟁력은 더욱 악화되었고 많은 기업들이 새로운 체제 속에서 더 이상 생존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은행의 부실화로 동독 경제 재건의 기초가 되어야할 금융 시스템 마저도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동독지역에 불어닥치는 특수 현상과 통화 공급의 팽창은 물가상승의 요인이 되어 가뜩이나 어려운 동독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물론 이러한 후유증은 통일의 과정에서 반드시 치뤄야할 것들이기는 하였지만 당시 서독정부는 예상 밖으로 성급하게 추진된 조치들로 인해 그에 버금가는 부작용들을 해결해내야 했다.



금융시스템의 확립


- 도이치 은행은 공식적인 통일이 선포된지 1년 남짓한 1991년 10월 말 현재 이미 75 만명에 달하는 동독인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드레스드너 은행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많은 130 만명의 동독 고객을 같은 기간 내에 확보하였다.

이와 반대로 동독 지역에 진출한 지점망의 경우는 도이치 은행이 드레스드너 은행을 앞서고 있다. 도이치 은행은 1991년 10월말 현재 250개의 지점망을 설치하여 총 11,000 명의 인력이 이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반면, 라이벌인 드레스드너 은행은 총 216개의 지점망에 7,600여명의 인력을 고용하였다.


구(舊) 동독의 은행 제도는 이원화된 서방 세계의 은행 제도와는 달리 국립은행(Staatsbank)이 중앙은행과 일반 시중은행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원화된 제도였다. 즉, 국립은행은 발권 은행으로서 통화량의 계획과 통제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한편, 일반 상업은행으로서의 여․수신 업무도 동시에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기업의 금융 업무를 비롯한 주택 관련 금융도 국립은행의 몫이었으며 무역, 통신, 우편 분야에 대한 금융 업무도 직접 주관하였다. 심지어 주민들이 해외 여행에 필요한 외환을 구입하는 업무도 국립은행에서 관할하였다.

동독의 은행 시스템에 있어서 숫적으로 가장 많은 조직을 갖추고 있던 금융 기관은 마을금고였다. 마을금고는 물론 제한적이기 하였지만 일반 민간인들에게 일상적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동독에도 시중은행들이 활동하여 왔지만 이 은행들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특별한 고객과 특수 업무만을 취급하였을 뿐 아니라 은행들 간 경쟁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일반 상업은행들이라고 해서 다양한 종류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범주에 속해있는 고객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수신과 여신 업무만을 담당해 왔을 정도이다.


전격적으로 단행된 화폐통합은 이러한 낙후했던 동독의 은행제도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일반 상업은행의 업무들이 국립은행에서 분리되었고 구 동독 국립은행의 후신으로서 만들어진 베를린 국립은행은 1994년 9월 30일 서독의 재건신용기금(KfW)에 통합되었다. 그리고 통합될 때까지 화폐 통합으로 발생하게 되는 차액을 보상해주는 차액 보전기금의 운영을 담당하였다. 베를린 국립은행이 서독의 재건신용기금으로 통합된 것은 동독의 국립은행을 공공 금융기관으로 전환시킨다는 통일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재건신용기금으로 통합된 구 동독의 국립은행은 그 이후 서독 연방에 새로 편입된 동독 신연방 5개주를 중심으로 경제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지원을 추진해 나갔다. 중소기업을 지원하여 시장경제 체제의 발판을 마련하는 일에 주력하였으며 구동독 시절 무참히 훼손되어진 환경을 되살리기 위한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독 신연방 5개주에 새로운 체제에 걸맞는 은행제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작업들이 강력히 추진되었다.


첫째, 서독 은행들의 활발한 참여

구 동독 지역에 시장경제 체제에 걸맞는 은행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독의 일반 상업은행들이 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생활 현장에서 국민들과 가깝게 접촉하며 새로운 체제 하에서의 은행의 기능을 피부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전국적인 지점망을 갖고 있는 일반 시중은행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상업은행들의 참여는 무엇보다도 동독지역에 지점망을 확충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동독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존의 마을금고와 같은 금융기관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계획들이 수행되는 동안 기존의 마을금고 고객들이 대량으로 이탈하여 서독에 본점을 둔 이들 은행의 고객들이 되어 버리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서독의 시중은행들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지점망과 함께 수많은 동독의 고객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경쟁적으로 참여한 두 은행은 서독 최대의 도이치 은행과 드레스드너 은행이다.  이 두 은행은 동서독 간 화폐통합이 발효된 89년 7월 1일 이후 경쟁적으로 동독 지역에 진출하였으며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 지점망과 고객을 확보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특히 알프레드 헤어하우젠(Alfred Herrhausen)에 이어 독일 최대 은행을 대표하고 있는 힐머 코퍼(Hilmer Kopper) 사장은 동독 진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금융인이다. 동독 국립은행의 관계자들과 끊임없는 접촉을 갖고 전문 금융인들을 동독에 파견하는 한편 은행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동독에 금융체계를 세우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이치 은행은 이러한 기초적인 작업을 통해 동독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통일 직후 과거 동독 국립은행 지점들을 동독의 도이치 신용은행과의 조인트 벤추어로 무려 100 여개를 인수하였다.

이러한 서독 은행들의 활동에 동독 주민들 역시 빠르게 적응해 갔다. 동독 주민들의 은행 이용 빈도가 급격히 증가되었으며 그에 따른 은행의 수신 업무도 급신장세를 나타내었다. 90년 화폐통합 직후 불과 3개월 만에 수십억 마르크의 예금고를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비교적 높은 이자를 보장하고 있는 정기 적금에는 하루에 500여개의 고객이 새로 가입하는 정도였다.

이것은 동독 주민들이 과거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운영되던 마을금고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을 뜻하며 새로운 체제 하에서의 화폐와 금융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 지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고정금리로 채권을 사는 주민들도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연방채권은 매우 인기가 높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코퍼 사장은 예상했던 것 보다 구 동독 지역에서의 금융업에 대한 사업전망이 높다고 전하고 있다. 도이치 은행이나 드레스드너 은행 모두 예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수신고가 여신고를 초과하는 의외의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하지만 동독 은행체계에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마을 금고, 협동조합 및 신용금고에서 저축예금이 엄청나게 인출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예금 공백은 연방은행에 의해서 보충되어져야 했으며 서독의 일반은행들도 이 문제를 막기 위해 추가 차관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양대 은행 모두 이런 식의 은행 운영에 제동을 걸게 되었고 정부와의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참고적으로 도이치 은행과 드레스드너 은행의 동독 진출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도이치 은행은 공식적인 통일이 선포된지 1년 남짓한 1991년 10월 말 현재 이미 75 만명에 달하는 동독인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드레스드너 은행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많은 130 만명의 동독 고객을 같은 기간 내에 확보하였다.

이와 반대로 동독 지역에 진출한 지점망의 경우는 도이치 은행이 드레스드너 은행을 앞서고 있다. 도이치 은행은 1991년 10월말 현재 250개의 지점망을 설치하여 총 11,000 명의 인력이 이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반면, 라이벌인 드레스드너 은행은 총 216개의 지점망에 7,600여명의 인력을 고용하였다.


이것은 코퍼 사장의 말처럼 제로 베이스에서 이루어낸 엄청난 실적이다. 그는 종종 “우리가 시작할 당시 우리가 갖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 터놓았으며 “수신 업무는 물론이고 여신 업무도 제로였다. 계좌 역시 제로였으며 그야 말로 제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라고 지난 날을 술회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 시중은행들의 참여는 대단하였다. 게다가 도이치 은행은 정부의 보증이 없이 독자적으로 동독 내 중소 기업 지원을 위해 수백억 마르크를 대출해주기도 하였다.


둘째, 자문과 교육훈련

지점망 확충 이외에 기존의 금융기관에 대한 자문활동과 금융인 확보를 위한 교육훈련도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금융 상품에 대한 이해와 금융 서비스를 파악하고 있는 금융인을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이를 위해 은행들은 서독의 전문 금융인을 동독에 파견하여 중추적인 일을 담당토록 하였고 일정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관련된 동독인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추진하였다. 또한 이렇게 훈련된 금융인들과 기업인들은 가장 먼저 동독 기업들에 대한 정확한 자료들을 만들어 내는 일에 투입되어야 했다.

새로운 체제 하에서의 기업 운영을 위해 기업의 현재 재무 상태를 서독의 기준에 맞게 파악해야 했으며 대다수의 동독 인민기업들을 민영화하기 위해서도 서독 마르크 화에 근거한 기업 대차대조표 작성은 서둘러 마무리해야할 것들이었다.

동독 지역의 회계업무는 서방국가의 업무와는 천차만별이었고 기업의 부채와 이자와 같은 개념도 애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철저한 통제 및 중앙 계획경제 체제 하에서 기업의 부채현황도 중앙의 승인에 따라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화폐교환의 차등 적용으로 일반적으로 대차대조표의 대변은 과대평가되었고 차변은 과소 평가되어 있었다.


일반 시중은행들의 이와 같은 참여와 활동은 영업과 무관한 사회적 봉사활동과 함께 추진된 것도 특이할 만하다. 대표적인 은행들로서 그리고 많은 고객들을 확보하게 된 두 은행이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독 사회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은행의 이미지도 높히고 고객을 더많이 확보하겠다는 기업 전략의 한 부분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도 하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도이치 은행 알프레드 헤어하우젠 재단은 이미 1천1백5십만 마르크를 들여 동독에 소재하고 있는 응급구호 사회단체가 동독 전체를 대상으로 활동하기에 필요한 차량을 지원한 바 있다.



동독기업의 누적 채무 청산


- 연방은행을 비롯한 양대 시중은행은 화폐통합으로 인해 발생한 손실분에 대한 보상 지원을 해주었고 그 이외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누적된 기업 채무 분은 트로이한트가 담보하도록 하였다.


동독의 인민기업들은 전통적으로 누적된 채무를 안고 있어 동독경제 활성화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 왔다. 그것은 동독의 계획경제 체제 하에서 기업의 채무는 기업의 생산성이나 영업실적과 무관하게 정해져 왔으며 부채 규모와 배정은 행정적으로 정해졌으며 임의로 지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업은 모든 잉여금을 국고에 귀속시켜야 했으며 승인된 투자 프로젝트가 있을 경우만 잉여금의 일부를 기업이 보유할 수 있었다. 만약에 투자계획이 취소될 경우 기업은 국립은행의 대출계획을 위해 보유금을 국고에 다시 환수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자에 대해서 기업은 아무런 계획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기업 적립금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단지 적립금과 유사한 종류의 기금 형태가 존재하긴 하였으나 그것 또한 중앙으로부터 기금조성, 규모, 사용, 이전 등에 대해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기업의 실적과 기금의 규모는 별개로 정해졌으며 기업의 리더들은 당장의 투자계획이 없다하더라도 가능한 한 수단을 동원해 더 많은 기금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무조건 먼저 확보하고 보자는 관습에 기인한 것이다.


결국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연방수상실은 통일 전후 다각도의 금융 협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는 많은 금융인들이 참석하였고 최선책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코퍼 사장은 동독 내 많은 기업들이 안고 있는 산적한 채무를 해결하는 독자안을 내놓았다.

그의 제안의 핵심은 당시 총 1,300억 DM에 달하는 기업채무가 은행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동독 인민기업을 관리하는 트로이한트가 기업이 지고 있는 채무도 역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트로이한트가 주관하고 있는 기업들을 처분하여 얻어들이는 수입으로 채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코퍼 사장의 이러한 초기 제안은 트로이한트가 예상을 뒤엎고 동독 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오히려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됨에 따라 비현실적이었음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동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양대 은행이 동독 경제의 할성화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업들의 누적 채무가 쟁점이 되고 있는 가운데 동독의 기업들은 또하나의 문제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화폐통합으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기업의 유동성이 더욱 악화됨에 따른 것이다. 바로 이것을 해결해내는 데 연방은행 뿐 아니라 일반시중은행 그리고 트로이한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연방은행을 비롯한 양대 시중은행은 화폐통합으로 인해 발생한 손실분에 대한 보상 지원을 해주었고 그 이외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누적된 기업 채무 분은 트로이한트가 담보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업이 채무 중 주택 금융 4백여 DM는 은행권이 아닌 타 금융기관들이 분담하여 담보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를 통해 침체에 빠졌던 기업도 서서히 원기를 되찾을 수 있었고 화폐통합을 이루어낸 지 10주년을 바라보는 동독 지역의 경제도 일정한 궤도에 진입해 있다. 결국 정부, 연방은행 그리고 일반 금융기관들이 참여하여 금융 시스템을 위해 이루어낸 업적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 이상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1999년 11월 현대경제연구원 통일경제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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