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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주역: 로베더, 브로이엘

박상봉 박사 2005. 12. 26. 19:34
 

독일통일의 주역

로베더(Rohwedder)와 브로이엘(Breuel)


로베더와 브로이엘은 통일을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였던 책임있는 지식인들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시류에 영합한 달콤한 주장들이 아니라 통일관련 한마디 한마디에 국가의 미래를 우선 생각하는 인물들이다.

통일을 이룬지 15주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통일당시 동독인들을 향해 환상과 거품을 심어주었던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며, 주어진 현실에 솔직했던 이 두 주역의 역할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로베더와 브로이엘은 독일통일 과정에서 가장 실질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다른 통일의 주역들이 통일의 여건과 정치적 틀을 짜는 일을 주로 하였다면 이 두 사람은 통일된 독일사회의 경제적 틀과 발판을 마련하는 일에 혼신을 다한 인물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이루어낸 작업은 6천5백여만 서독인들이 어떻게 1천6백만에 이르는 동독형제들을 품에 안고 큰 경제적 고통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서독 8천1백만명의 의식주 문제를 비롯하여 통일독일을 지탱하는 기업들의 경쟁력 확보방안 등이 이들이 추구한 목표였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로베더에게는 이 희생이 죽음이었으며 브로이엘에게는 통일독일 사회에서 가장 악독한 여성이라는 칭호였다. 특히 동독인들에게 브로이엘 청장은 인정사정 없는 철면피와 같은 존재였으며 동독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암살까지 당하면서도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낸 로베더와 동독인들에게 가장 악랄한 여성이라는 비판을 마다하지 않고 로베더 청장이 수행한 일들을 마무리해낸 브로이엘 여사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통일을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였던 책임있는 지식인들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시류에 영합한 달콤한 주장들이 아니라 통일관련 한마디 한마디에 국가의 미래를 우선 생각하는 인물들이다. 통일을 이룬지 15주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통일당시 동독인들을 향해 환상과 거품을 심어주었던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며, 주어진 현실에 솔직했던 이 두 주역의 역할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트로이한트와 로베더의 죽음


- ‘사유화’라고 하는 개념은 일반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경제적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일반적인 의미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개념 속에는 국가가 관리하고 있던 인민재산을 민간인들에게 이양시킴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마감하고 경쟁의 틀을 만들어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는 역사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통일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주제는 주로 정치적 차원에 속하는 것들이며 대부분의 통일전문가들도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통일방안과 형태, 체제통합에 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북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라는 논의들이 오랜동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독일통일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교훈은 통일이야말로 먹고사는 문제이며 이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는 통일은 아무리 환상적인 통일방안이 마련된다고 해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동서독 통일과정에서 이 문제에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관이 트로이한트(신탁관리청)였으며 로베더와 브로이엘은 이 기관의 실질적인 1대, 2대 대표이었다.

이들이 몸담았던 트로이한트는 한마디로 동독재산을 사유화 시키는 일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여기서 사유화라고 하는 뜻은 그 동안 국가의 계획과 통제에 따라 운영되던 경제를 개인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또한 동서독 간 경제통합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표현을 빌자면 사유화 조치를 통하여 선의의 경쟁자들이 만들어지고 비로소 시장이 형성된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바로 국가의 계획과 통제를 벗어나 유한한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초작업이라는 것이다.


트로이한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유화에 대한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사유화는 영어로 privatization(독일어 Privatisierung)로 표기되어 기업의 민영화와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으나 ‘사유화’라고 하는 개념은 일반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경제적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일반적인 의미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개념 속에는 국가가 관리하고 있던 인민재산을 민간인들에게 이양시킴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마감하고 경쟁의 틀을 만들어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는 역사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민영화라는 단어 대신에 사유화라는 개념을 굳이 선택해서 쓰고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사유화 작업은 이미 그 일의 양적․질적 규모로 보아 상당한 갈등과 혼란을 내재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는 사유재산제도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들의 무절제한 부의 축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져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질적으로 오늘날 성숙되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에는 소위 부익부 빈익빈의 모습이 가장 커다란 문제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개인의 사유재산을 엄격히 금지했던 사회주의 체제도 부의 편중현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결핍된 사회에서 권력의 무절제한 남용이 더 큰 사회적 모순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거울삼아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사회주의 사회에 이렇듯 불합리한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소위 인민재산이라는 명목 하에 모든 경제적 권력이 공산당에 위임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트로이한트의 임무는 바로 이렇게 공산당이 관리하고 독점하고 있는 인민재산을 다시 민간에게 환원시켜주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은 공산당의 권력기반을 실질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실권을 행사하던 군부와 당핵심 간부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트로이한트의 실질적인 초대 책임자였던 데트레프 카르스텐 로베더(Rohwedder) 청장도 이 과정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관계와 사업계를 두루 거쳐왔으며 특히 위기관리 매니저로 정평이 나있던 로베더는 통일 직후 콜 총리로 부터 도탄에 빠진 동독경제를 관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지 불과 몇달이 안된 1990년 4월 1일 부활절 휴가 중 뒤셀도르프 자택에서 사살되었다. 로베더 청장은 고성능 저격용 총기에 의해서 머리를 관통당했으며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독일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은 동독 슈타지(안전기획부)의 지원을 받아왔던 서독의 적군파에 의한 범행이라고 결론지었다.


사유화의 의미와 종류


- 기업활동이 국가의 계획에 좌우된다는 것이 비효율적이다. 경제규모가 확대되고 산업이 다양화되는 상황 속에서 국가가 수립한 계획이 얼마나 정확하고 합리적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트로이한트가 추진했던 사유화 작업의 대상에는 기업, 금융기관, 호텔, 음식점, 도․소매업, 토지 및 농지, 각종 임야, 주택 그리고 정당이나 군대 및 각종 단체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업에 대한 사유화 작업은 보다 신중하게 추진되었다. 그것은 기업이야말로 생산의 주체로서 한 사회의 물질적 풍요로움과 윤택한 삶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피폐하고 낙후한 경제의 회복도 사실은 기업이 중심이 되어 생산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확보해야 가능하다.

국가가 관리하고 운영하던 회사를 사유화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시장경제 체제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데 있다. 경제의 효율성을 확보하고 개인의 창의성을 활용하기 위해 시장의 틀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그 틀 속에 ‘경쟁’ 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장에 참여한 다수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경쟁을 통하여 가격을 결정하게 됨에 따라 고객은 가장 합리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 이론가들은 국가의 계획과 통제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주의 경제의 몰락은 바로 이와 같은 경쟁의 장치가 배제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생산활동의 목적이 국가로 부터 시달된 계획량을 차질없이 산출해내는 것에 놓여있는 사회주의 기업의 한계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우선 기업활동이 국가의 계획에 좌우된다는 것이 비효율적이다. 경제규모가 확대되고 산업이 다양화되는 상황 속에서 국가가 수립한 계획이 얼마나 정확하고 합리적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계획에 필요한 기초 자료들의 정확성도 문제이지만 계획을 세우는 담당자들의 자질도 문제 투성이이다. 수 많은 개별 회사들의 업무내용을 파악하여 일일이 그 지침을 만들 수도 없으며 그 많은 기업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은 물론이고 의욕도 없는 것이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계획당국은 통제하고 관리해야할 기업을 줄여나갔으며 이로 인해 기업은 점점 대형화될 수 밖에 없었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가 지나고 다양한 품종을 필요에 따라 소량으로 생산해야 하는 시대 속에서 이러한 대형화 현상은 비효율적 경제의 또 다른 모습이다. 실제로 통일 직전 동서독 간 기업구조를 비교해보면 동독의 산업들이 얼마나 대기업 위주로 편성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통일 직전 동독에는 근로자 501명 이상의 대형기업이 전체 기업의 40.9 %에 달했던 반면 서독의 경우 대기업의 비율이 0.4 %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명 이하의 소기업의 점유율은 서독의 경우 무려 88 %에 달했고 동독의 경우에는 불과 3.5 %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개인의 창의성이 점점 중요시 되는 정보화 사회 속에서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해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상대적 몰락은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로베더와 브로이엘 청장이 야심을 갖고 추진한 사유화 작업에 대한 또 다른 정의는 국가가 관리하던 대규모의 기업들을 수천개의 중 소기업들로 분할하여 민간에게 이양하여 다수의 투자자와 기업가 집단을 만들어 경쟁의 바탕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1994년 12월 31일자로 종결된 트로이한트 사업을 통해서 총 1만5천여개의 기업이 민간에게 이양되었으며 67,700 ha의 농임업 용지가 개인에게 매각되었다. 이 가운데는 외국인의 참여도 적극 권장되었고 총 860여개의 기업을 이들 외국인들이 매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투자자들 중에는 프랑스, 스위스,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웨덴, 덴마아크 등 유럽인들이 대부분이었고 비유럽권에서는 미국이 유일하게 60여개의 동독기업의 사유화에 동참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사유화 작업의 3원칙과 브로이엘


- 일자리를 요구하며 연일 모여드는 동독인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와 장미빛 미래를 남발하며 인기관리에 여념이 없는 서독 정치인들을 향하여 'Es gibt kein Butterbrot umsonst 공짜로 버터 빵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외칠 수 있었던 브로이엘 여사의 역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로베더는 물론이고 그 후임으로 임명된 브로이엘 청장이 인민재산을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 했던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효율적인 관리와 경영체제 확립

사회주의 기업의 가장 큰 약점 중에 하나는 기업활동의 결과에 대한 관리자의 책임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평가된다. 당 간부들이기도 한 회사 운영자들은 상부로 부터 하달된 계획량에 대한 달성여부에만 큰 비중을 두게 될 뿐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과 경쟁력 제고라는 경제적 의미에는 무관심하다. 따라서 동독경제를 회복시킨다는 취지 하에 추진되고 있는 사유화 작업은 기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경쟁력있는 기업으로 육성할 수 있는 관리체계를 확립하고 그 일을 담당할 수 있는 관리자 및 경영자를 육성하는 일이 없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아준 러시아의 체제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정부가 시장경제에 익숙한 매니저들을 양성하는 교육훈련 사업을 중요하게 취급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라고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신속한 사유화

사유화 작업의 두번째 원칙은 ‘시간’ 이라는 개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것이 낫다’는 의미와도 상통되는 것으로 사유화 과정에서 나타날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기업이나 각종 재산에 대한 처리를 망설이는 행위를 경계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물론 사유화 작업을 서둘러 처리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드러나게 된다.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며 각종 사업에 대한 합리화 조치로 서민들의 고통이 가중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핑계로 기업 간부들이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현상도 동독을 포함한 구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드러나 경제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도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

사유화라는 개념은 기업을 민간에게 이양한다는 의미 이외에도 기존의 비효율적 기업에 대해 전반적으로 새로운 평가를 내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회생 불가능한 기업은 서둘러 정리해야 하며 지원을 통하여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과감한 구제책을 마련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속한 사유화 원칙이 의미하는 것은 민영화, 기업정리, 기업구제라고 하는 세가지 기업처리 방안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내리고 그에 따른 조치를 신속히 마련한다는 내용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원칙을 지키기가 어려운 것은 기업의 사유화 작업은 각종 사회적 갈등과 부작용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실업이 급등하고 구 사회주의 체제에 비해 까다로워진 사회보장 체계 등, 새로운 체제에 대한 불안이 동독인들에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투표권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인들의 과감한 결단을 기대하기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로베더와 브로이엘 청장의 역할이 돋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국민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애매모호한 사유화 작업은 경제 회복의 틀은 마련하지도 못한 채 ‘임금인상 - 물가앙등 - 사회불안’ 이라고 하는 악순환의 반복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국민적 수용

이미 지적하였듯이 사유화 작업은 많은 사회적 갈등과 부작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사유화 과정에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각종 사회문제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기울여 그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 원칙이 앞에서 설정한 ‘신속한 사유화’ 라는 원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사유화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추진하되 그에 따른 갈등과 문제점에 구체적인 대책들을 세우고 적극적인 홍보를 통하여 국민들의 불안을 떨쳐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독일통일의 주역으로서 동독국민들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꿈꾸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의 풍요로움을 어느 정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의 이해는 사유화 작업의 또 하나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아이제나흐 소재 동독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여 사유화 한 투자자는 서독의 폴크스바겐 사였다. 인수 이후 폴크스바겐 사는 인수한 공장을 초현대식 장비와 시설을 갖춘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시켰다. 하지만 폴크스바겐 사의 이러한 투자는 사유화의 전략적 측면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공장의 초현대화를 통하여 노동 생산성의 엄청난 증가를 이루어냈으나 과거 1만여명 이상이 일하던 이곳에 불과 800명이 남게 되었다는 사실로 부터 기업의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고용문제와 같은 전반적인 경제여건도 도외시 해서는 안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을 통해 ‘국민적 수용’ 이라는 원칙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거론한 세가지 원칙은 로베더와 브로이엘 여사가 추진한 사유화 과정에서 아주 엄격하게 지켜낸 기준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통일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기 이전에 8천여만 독일국민들의 여유로운 삶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무책임한 동독 핵심세력들의 부정한 재산들이 몰수되었으며 무책임한 기업간부들의 해고가 이루어졌다. 수많은 서독 기업가들이 동독에 진출하여 기업의 지도자들이 되었으며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적지않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 두 주역들은 저주의 대상이었고 특히 동독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독 공산간부들에게는 혁명가의 모습으로 다가섰으며 동독 국민들에게는 직장을 빼앗는 소위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는 철면피의 대변자이었다.

무엇보다도 로베더 청장이 암살된 후 트로이한트의 수장이 되어 남자도 이루어내기 힘든 이 역사적인 임무를 완수해낸 브로이엘 여사의 베짱과 의지는 투철한 역사의식과 이론적 무장이 없이는 힘든 작업이었다. 일자리를 요구하며 연일 모여드는 동독인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와 장미빛 미래를 남발하며 인기관리에 여념이 없는 서독 정치인들을 향하여 'Es gibt kein Butterbrot umsonst 공짜로 버터 빵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외칠 수 있었던 브로이엘 여사의 역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지주계급에 대한 저항과 재산몰수가 공산혁명의 주류이었다면 이들의 사유화 작업은 그 공산혁명의 주체들로 부터 과거 경제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그들이 인민재산이라는 명분 하에 마음대로 관리하고 있는 당의 재산을 다시 국민들에게 환원시키는 작업이었다.  바로 이 일의 중심에 브로이엘 그리고 그 전임자 로베더가 자리잡고 있다.


로베더와 브로이엘의 교훈


- 독일의 제2공영방송인 ZDF는 독일연방공화국 창건 56돌과 베를린 장벽붕괴 16돌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를 인용하여 동독인들의 91%, 서독인의 82%가 통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르베더와 브로이엘의 사유화 작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선 냉철한 머리로 대변되는 합리적 사고와 결정에 대한 명제이다. 즉, 사유화 작업이야 말로 통일한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우리민족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라는 사실로 부터 이 작업이 감상적이나 적당주의식의 형식적 행사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통일과 함께 새로운 체제에 대한 분명한 선택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전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는 상황 속에서 이에 대한 선택은 자명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통일이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작업에 대한 지나치게 감상적인 인식은 자칫 엄청난 오류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며 사회의 기본적인 운영체제 라든가 경제질서와 같은 제도적 기본틀을 짜는 작업에 우리들은 보다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또 하나의 교훈은 이러한 냉정함 못지않게 그 원칙과 틀 속에서 보다 관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훈은 아래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더욱 분명해진다.

통일 후 이미 9년째로 접어들고 있는 독일사회가 아직도 동․서독 간의 심리적, 사회적 갈등으로 지역간 이질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들은 이와같은 이질감과 행동양식의 차이, 빈부의 격차와 사고형태를 비롯한 인식의 차이로 야기되는 갈등을 「머리 속의 장벽 Mauer im Kopf」이라는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으며 물리적으로 동서를 가르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베를린을 둘러쌌던 장벽을 사라졌지만 아직도 동서독 주민들의 가슴 속에는 분단시절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갈등으로 또하나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통일 후 아직까지도 양독인의 지역적 차이를 드러내는 오시즈나 베시즈(Ossis und Wessis)와 같은 단어들이 자주 사용된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두 단어는 단순히 양독인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닌 것 이외에도 이 단어 속에는 건방지고 잘난척하는 서독인,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가난뱅이 동독인이라는 냉소적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 인해 동서간의 갈등은 더욱 벌어지게 되고 상대적으로 빈곤한 동독인들의 열등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이질감과 동독인들의 열등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 얼마되지 않아 서독 뒤셀도르프 소재 필립스 체육관에서는 미국의 흑인복서 햄브릭과 당시 독일의 세계 챔피언인 헨리 마스케 동독선수 사이의 제1차 지명방어전이 열렸다. 원래 복싱이라는 스포츠 자체에 대한 논란이 격심하여 프로복싱에 대한 호응도가 매우 낮은 독일사회이긴 하지만 마스케 선수가 유일한 라이트 헤비급 세계 챔피언으로서의 위치를 방어해야 한다는 자존심이 걸려있는 결전이어서 독일인의 관심은 대단하였다. 독일 최고의 여성 앵커 슈라이네마커스를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필립스 체육관으로 몰려가는 등 93년 9월 18일 밤은 뒤셀도르프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마스케 선수는 통일된 독일사회에서 독일을 대표해서 결전에 임하는 자세를 묻는 질문에 “나는 동독인들도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겠다.” 라고 대답함으로 동․서독 간의 사회적 갈등의 깊은 뿌리를 암시한 바있다. 이렇듯 동독인들이 느끼는 열등의식은 사회전반에 확대되어 있다. 이것이 때로는 외국인에 대한 증오감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학대로 표출되기도 하여 통독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즉, 동서독은 외형상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화폐통합을 비롯한 경제적 통합도 마무리되고 있으나 아직도 양독인들의 머리는 하나가 되지않고 있다. 「트라반트」와 「바르트부르그」(트라반트와 바르트부르그는 동독에서 생산되던 유일한 두가지 승용차로 2기통이며 외관도 철이 아니라 자기류로 만들어졌다) 도 십 여 년씩 기다려야 구입할 수 있었던 동독인들에게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다이믈러 벤츠를 구입할 수 있는 서독인들은 한편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라는 투철한 이념 속에서 살아온 자신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장본인들인 것이다.


동독인들의 이러한 의식은 사유화 과정이 진척됨에 따라 더욱 가중되어 갔다. 늘어나는 실업자들로 야기된 사회불안은 경제통합의 주역으로서 사유화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트로이한트의 입지를 더욱 좁게하였다. 사유화 작업이야 말로 동독재산을 민영화 시킨다는 명분 하에 돈많은 서독인들에게 팔아치우는 작업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동독인들은 자신들의 상대적 박탈감의 책임을 로베더와 브로이엘에게 돌리곤 하였다. 통일 후 수 년 동안 베를린 소재 트로이한트 본부 앞에서 벌어져 왔던 수많은 시위행각이며 로베더 청장의 암살, 연일 지면을 메웠던 사유화 관련 부작용과 문제점들이 그 어려움을 잘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 두 주역들은 주어진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해내었다. 이제 독일이 통일된 지 16년째 접어들고 있다. 구 동독인들의 불만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통일독일의 경제는 서서히 본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 독일의 제2공영방송인 ZDF는 독일연방공화국 창건 56돌과 베를린 장벽붕괴 16돌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를 인용하여 동독인들의 91%, 서독인의 82%가 통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통치자의 투철한 의지, 책임있는 통일 전문가들의 행동, 국민 모두의 합의, 냉철하고 합리적인 통일 담당자 그리고 각종 부작용과 갈등을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풀어갈 통일의 역군들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통일 16년째를 맞는 독일사회가 통일의 후유증을 서서히 해결해내고 있다는 보도들이 나오면서 이 두 주역들의 신념과 희생을 되새기게 된다.

I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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