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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주역: 바, 브란트, 겐셔

박상봉 박사 2005. 12. 23. 08:01
 

독일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와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


Berlin wird leben.

(베를린은 살아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Jetzt waechst zusammen, was zusammengehoert.

        (하나이던 것이 이제야 비로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구나) - 브란트 -


에곤 바(Egon Bahr)


- 서베를린-서독간 통행협정, 독소조약, 대동유럽 국가들의 관계 개선 등 바르는 브란트의 분신이 되어 현장에서 많은 일을 이루어냈다. 바르의 가장 큰 업적은 1972년 12월 21일에는 동독의 미카엘 콜 차관을 협상 파트너로 ‘동서독 관계에 대한 기본조약’을 이끌어낸 것이다.


에곤 바는 거의 빌리 브란트의 분신으로 브란트와 함께 동방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당시 적지않은 저항을 받았던 동방정책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간 인물이며 이러한 강력한 추진력의 배경에는 탁월한 국제적 감각과 뚜렷한 소신이 자리잡고 있다.

바르의 강한 실천력과 소신은 지난 1963년 투찡 기독아카데미에서 제시한 발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발표문에는 대(對) 동독 및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정책에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는 입장과 동서독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소련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의 영향력을 재고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주장이 들어있다. 이 내용들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것들이었으며 할슈타인적 사고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바의 발상의 전환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내용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첫째, 동․서독 재통일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 때까지 동독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동독이라는 국가는 합법적인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독일의 재통일도 동독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대서방 외교를 강화하여 통일의 주도권을 서독이 정치적, 인위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바르의 신(新)사고는 동독과 동유럽 국가들을 배제한 통일논의는 비현실적이며 유럽 전체의 안보와 평화를 위해서도 바람직 하지 않다는 인식이었다. 즉 독일의 재통일은 어느 한 순간 쟁취해내는 일과성 사건이 아니라 여러 단계와 조정을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독의 참여를 배제한 통일논의가 아니라 동독의 참여를 전제로한 통일논의로의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당시 브란트 수상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바르 차관이 추진한 정책들은 이러한 신(新)사고의 구체적인 모습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르 차관에 의해서 이루어진 최초의 가시적인 성과는 지난 71년 12월 동독정부와 이끌어낸 서독-서베를린 간 통행협정이다. ‘유럽내 상호갈등을 해소하고 긴장완화를 위해 전승국은 물론이고 동서독 당사자들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되고 있는 협정서는 대립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 속에서 구체적인 문제들을 풀어가야 한다는 소신이 깃들여 있다.


둘째,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가 중요하다.

새로운 시대는 동독은 물론이고 소련 역시 적대국으로 남겨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특히 통일문제에 있어서 소련을 무시한 어떠한 통일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파악한 바르는 서둘러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중요한 과제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이 과제는 브란트 수상이 1970년 8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독․소 조약을 체결함으로 해결되었다. 독소조약의 체결은 양국의 관계정상화를 의미하였고 그로 부터 20년 만에 이루어진 독일 재통일은 당시 바르의 이와 같은 생각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유럽 사회를 개혁과 개방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시대적 흐름의 진원지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였고 동독 역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무관할 수 없었다. 또한 동서독 통일이 가능했던 것도 무엇보다도 독일문제를 독일민족에게 위임한 소련의 고르바쵸프 대통령의 전향적인 결정 때문이 아닌가.


셋째, 접근을 통한 변화 (Wandel durch Annaeherung)

독일의 재통일을 과정으로 이해한 에곤 바르는 여러 가지 단계와 조정을 거치며 통일의 여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동독과의 다양한 교류와 접근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실질적인 효과를 동반하였으며 국민들로 부터 더 많은 공감대를 얻게되었다. 그 이후 ‘접근을 통한 변화’ 는 모든 통일논의의 기본전략이 되었으며 1989년 동독인의 대탈출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 위기에 처할 때까지 거의 불문율처럼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바르의 입장과 소신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철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고 1969년에 연방총리에 선출된 브란트는 그를 총리실 차관으로 임명하였다. 서베를린-서독간 통행협정, 독소조약, 대동유럽 국가들의 관계 개선 등 바르는 브란트의 분신이 되어 현장에서 많은 일을 이루어냈다. 바르의 가장 큰 업적은 1972년 12월 21일에는 동독의 미카엘 콜 차관을 협상 파트너로 ‘동서독 관계에 대한 기본조약’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양국관계는 정상화 될 수 있었고 불가능하게 보였던 재통일의 실질적인 여건도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야심을 갖고 이루어낸 동서독 간 기본합의서의 핵심사항은 다음과 같다.


▲ 양국은 동등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이웃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 각국의 국경을 존중하며 모든 폭력을 삼가한다.

▲ 양국은 유럽의 안보와 협력을 지원하며 군비축소라는 국제적 여망에 부응토록 한다.

▲ 양국의 주권을 존중하며 쌍방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인정한다.

▲ 서독이 고수하던 유일국가론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

▲ 대표부를 상호 교환하고 양독의 유엔가입을 추진한다.

▲ 동서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들을 마련한다.

▲ 여행의 제한조치를 점차 해제하며 쌍방 국경지역에 통로를 마련한다.


하지만 이런 급격한 대동독정책의 전환은 연정 내 자민당과의 충돌은 물론 야당이었던 기민련의 반대에 부딛치며 빌리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로 이어진다. 불신임 결의안은 2표 부족으로 부결되지만 이 과정에서 동독의 슈타지가 개입해 4명의 표를 매수했다는 사실이 추후에 알려진 바 있다.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 통일은 브란트에 의해서 시작되어 헬무트 콜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현장을 목격하게 하시고 독일국민들과 통일의 과정과정을 함께 나누고 동참하게 해주셔서 ....” 라는 브란트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전쟁, 분단 그리고 통일이라고 하는 격정의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늘 선두에 서서 독일민족을 이끌어온 80 정객의 결코 버릴 수 없는 삶전체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1969년 집권 초기 에곤 바를 연방총리실 차관으로 임명한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의 실질적인 주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정치가 브란트는 그의 청년시절에서도 보듯이 투철한 정치철학과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독일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큰 역할을 감당해내는 큰 인물이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1913년 생인 청년 브란트는 스칸디나비아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전쟁이 종결되자 조국을 다시 찾은 브란트는 1957년 분단의 상징이며 냉전의 도시인 베를린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시장으로서 브란트가 추진한 일들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역량을 암시하는 것들이었다.  ‘베를린 정책에 관한 4가지 기본원칙’을 만들어 어정쩡하였던 베를린의 위상을 분명히 하였다. 기본원칙을 통하여 브란트 시장은 서베를린은 자유민주국가이며 베를린 시민은 어떤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는 완전한 자율권을 갖는다고 선포 함과 동시에 4대 전승국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였다.

또한 1961년에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할 것에 합의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획기적인 정책을 통하여 평화와 공존 그리고 주권 회복과 평화적 통일을 위한 브란트의 현실정치를 보게된다.  1969년 연방수상으로 선출된 브란트는 동독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회담이 열렸던 에어푸르트 시민들로 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이 기회를 이용해 개인적으로 부흐발트에 위치한 나치 수용소를 방문체류하며 나치 정권의 만행에 대한 사죄의 기회로 삼았다.

동독정부와의 정상회담 이후 브란트 수상은 1970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독․소관계 정상화를 이루었으며 화해와 공존 그리고 평화를 바탕으로 한 동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독․소 조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무력사용은 금지하며 쌍방의 모든 문제는 유엔헌장을 기준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 현재의 국경은 존중되며 차후에도 국경문제는 거론치 않는다.

▲ 양국은 유럽의 현재 국경을 그대로 인정한다. 동서독 국경 그리고 대폴란드 국경인 오더

   나이스 국경도 현재는 물론이고 차후에도 그대로 인정한다.

▲ 과거 양국 사이에 체결된 국가간 조약은 침해받지 않는다.


독․소 조약에도 ‘독일통일을 위한 서신 Brief zur Einheit’ 이 포함되어 있다. 화해와 협력 그리고 대화의 정치를 통해 동서독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적 염원을 실현시켜 간다는 브란트 총리의 통일정책의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서신의 내용은 다른 나라와 맺는 협정과 조약은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독일의 정치적 목적이나 통일문제에 관한 독일민족 자결권과 배치하지 않는다’ 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은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 중인 브란트 수상이 바르샤바 게토에 설치된 나치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위령탑에서 무릎을 꿇는 사건으로 그 절정을 맞게된다. 이러한 정치적 이벤트로 독일은 다시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신뢰받는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고 브란트 수상의 정치적 이미지는 서독사회를 넘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그가 제시한 획기적인 동방정책은 냉전으로 대립되어 있는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도 국가의 정통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밑받침한 것이었고 인류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치도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이미 전세계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주의권을 인정하고 그 체제 하에서의 발전가능성도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인식에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동독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외교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할슈타인 원칙은 시대적 흐름에 역행한다고 주장하였고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화해와 협력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71년 노르웨이 의회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브란트를 선출하였다. 정직한 양심과 불굴의 투지로 과거 적대국들에 화해의 악수를 내밀어 유럽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선정 이유였으며 노벨평화상 선정과정에서 이렇듯 쉽게 수상자가 결정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브란트의 업적은 탁월한 것으로 유럽 및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동서독 통일은 브란트에 의해서 시작되어 헬무트 콜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현장을 목격하게 하시고 독일국민들과 통일의 과정과정을 함께 나누고 동참하게 해주셔서 ....” 라는 브란트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전쟁, 분단 그리고 통일이라고 하는 격정의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늘 선두에 서서 독일민족을 이끌어온 80 정객의 결코 버릴 수 없는 삶전체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한스-디트리히 겐셔 (Hans-Dietrich Genscher)


- “폴란드 민족은 50년전에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최대 피해자들 입니다. 폴란드 국민은 이제는 안전한 국경을 보장받고 그 안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독일민족은 가해자 입니다. 가해자인 우리가 폴란드 국경을 재론하며 과거영토에 대한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한 슬픈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폴란드와 함께 미래의 보다 나은 유럽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현 국경에 대한 보장은 유럽의 평화공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 될 것입니다.”


통일 당시 콜 정부의 외무장관이었던 겐셔 장관의 역할은 동독 탈출자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다. 겐셔에 의해서 추진되어진 외교 전략의 두가지 큰 업적은 다음과 같다.


◉ 탈출동독 주민들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동독인들의 동요는 이미 1987년 6월 영국의 유명한 팝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콘서트 사건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서베를린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 광장에서 열렸던 콘서트장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팝 음악을 들으려 서쪽으로 몰려드는 청년들을 경찰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무력이 사용되었고 이때부터 동독 청년들의 불만이 정치적 이슈를 띄게 되었다. 1988년도에는 동독 공산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다 조직적인 반공시위가 일어났다. 공식행사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입크네히트 (Rosa Luxemburg-Liebknecht Demonstration) 기념시위대에 가담하여 호네커 정부를 비판하는가 하면 소련과 동구권의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공산정권에 반기를 든 동독 청년들의 시위도 점점 세력화되어갔다.

전통 야당도시 라이프찌히에서는 월요일 마다 시위대가 일어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월요데모는 점점 조직화 대형화되어갔다. “우리가 국민이다” 라는 구호는 어느 새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이다 라는 구호로 바뀌었으며 이 사건은 더이상 동독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탈출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바르샤뱌, 프라하 소재 서독대사관에는 자유를 요구하는 동독인들로 꽉차 있었다.

겐셔 장관은 89년 9월 30일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에 진입하여 서독으로의 이주를 요구하고 있던 3,500여명의 동독 탈출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약속하였고 이 약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겐셔 장관은 이들을 서독으로 수송할 특별열차가 제삼국이 아니라 동독영토를 경유하여 서독에 도착할 것을 동독에 요구하였고 이 요구 또한 동독정부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부 동독인들은 달리는 열차에 뛰어오르기도 하는 등 이 조치는 겐셔가 이루어낸 또하나의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세계 언론이 이 사건에 집중하였고 국경없는 보도들은 동독사회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어 개혁을 요구하는 동독인들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동독 탈출자들이 서독으로 이주하기 위한 경유지가 되어 갔고 서독 정부는 모든 탈출자들을 안전하게 서독으로 수송하였다.

동독정부는 폴란드 국경을 봉쇄하고 잇따라 다른 동구권 국가들의 국경을 통제하며 동독인들의 이돌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절정에 달한 동독인의 개혁의지와 자유에 대한 갈망은 어떠한 물리적 통제로도 막을 수 없었다.

동포애, 이를 기초로한 실질적인 외교전략, 이 두가지 원칙으로 서독정부는 동독인로 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동독인들은 새로운 기대와 희망 속에서 동독 대탈출을 감행하였다.


◉ 국제사회에 대한 신뢰감 확보

서독정부의 또하나의 외교전략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국제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동독사태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서독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게 되자 폴란드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의 우려도 점점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뉴욕 시는 9월에 있을 유엔 총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겐셔 외무장관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독 사태 해결을 위한 각국 외무장관과의 회담을 열었다. 쉐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을 비롯하여 폴란드, 체코 그리고 동독 외무장관들을 만났으며 동독탈출 사태에 대한 각국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겐셔 장관은 유엔총회에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하였고 이 기회를 통하여 서독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겐셔가 가장 핵심적으로 전달한 사항은 동독사태로 인해 주변의 어떠한 나라도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을 것이었다. 폴란드를 향한 연설은 전범으로서의 독일에 대한 솔직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독일민족의 책임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폴란드 민족은 50년전에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최대 피해자들 입니다. 폴란드 국민은 이제는 안전한 국경을 보장받고 그 안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독일민족은 가해자 입니다. 가해자인 우리가 폴란드 국경을 재론하며 과거영토에 대한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한 슬픈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폴란드와 함께 미래의 보다 나은 유럽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현 국경에 대한 보장은 유럽의 평화공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 될것입니다.”


겐셔 장관의 이러한 솔직한 고백으로 독일에 대한 세계각국의 우려는 많이 완화되었고 앞으로 야기될 동독사태에 대한 서독정부의 개입도 그만큼 수월해졌다.

무엇보다도 통일과 관련하여 외무부장관 겐셔의 역할은 동서독을 포함한 미, 영, 불, 소련의 외무장관들의 회담에서 찾게된다. 소위 2+4 회담으로 명명되어지는 6개국 외무장관 회담은 90년 5월 5일에 시작되어 9월 12일 종결되었다. 하지만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중 이루어진 성과는 그 어떤 외교사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수차례의 개별회담과 단체회담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독일문제에 대한 동서독과 4대 전승국의 입장이 완벽히 정리되었다.

독일통일은 서독외교의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겐셔 장관의 외교적 성과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2+4 회담 일정과 각국의 대표자

        

        

        일       정

        대    표    자

* 단체회담

제1차 회담 (90년 5월 5일) - 장소 : 본

제2차 회담 (6월 22일) - 장소 : 베를린

제3차 회담 (7월 17일) - 장소 : 파리

제4차 회담 (9월 2일) - 장소 : 모스크바

* 독․소 개별회담

제네바 회담 (5월 22일)

코펜하겐 회담 (6월 5일)

브레스트 회담 (6월 11일)

뮌스터 회담 (6월 19일)

 

미국 : 베이커 외무장관 

영국 : 허드 외무장관 

프랑스 : 두마스 외무장관 

소련 : 쉐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서독 : 겐셔 외무장관 

동독 : 드메지어 총리 


2+4 회담을 통하여 비로소 독일은 완전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통일 문제를 독일민족 스스로 결정할 문제로 만들었다. 회담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일은 대폴란드 국경인 오더 나이스 강을 인정하므로 1937년 독일영토의 25 퍼센트에 해당

   되는 지역을 폴란드에 양도한다.

◇ 통일된 독일군은 37만명을 초과할 수 없다. 핵 무기, 화학무기 및 생물학 무기의 보유는

   포기한다.

◇ 소련군이 동독지역에서 완전 철수할 때까지 나토 소속 군의 동독내 주둔은 불허한다. 또한

   소련군이 완전철수한 후에도 동독지역에는 나토 소속 외국군의 주둔이나 핵무기 보유를 금

   지한다.

◇ 조약에 대한 각국의 비준이 이루어짐에 따라 독일은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게 된다.


2+4 회담의 합의사항은 각국 의회로 부터 통과되었고 1991년 3월 15일 소련이 마지막으로 의회의 비준을 받으므로 독일역사의 획을 긋는 독일문제와 통일문제는 완전 매듭지어지게 되었다.


공통점과 평가


지금까지 역사의 현장에서 통일을 이루어낸 바르, 브란트, 겐셔의 정치여정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도 이 세 정치인에게는 통일을 역사적 과제로 인식하고 이 문제를 늘 마음의 중심에 간직하고 행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정치감각을 익히고 국가의 정책들을 추진해왔던 것도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정치적 역량은 사사로운 개인이나 집단을 위한 정치 보다는 미래의 비전과 역사의식을 키우는 독일의 정치적 풍토에 그 일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이들 세 정치인의 국가적 비전은 원칙과 관용에 투철하다.

진리 앞에 겸손한 자만이 약소국․패전국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교훈을 몸소 실천한 브란트 수상, 민족의 장래를 위해 불철주야 매진할 수 있었던 겐셔 장관, 대립과 반목의 시대적 상황에 맞서 화해와 협력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던 바르 차관, 이들의 업적은 지금 이순간에도 자유롭게 동서를 왕래하는 독일국민들의 바쁜 걸음걸이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통일에 대한 바르, 브란트 그리고 겐셔의 입장은 하나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어느 누구도 파기할 수 없다. 이 원칙 하에 이들은 통일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이 민족이 반드시 이루어야할 과제로 이해하고 있었다. 동독, 소련과 화해하고 폴란드 국민 앞에 사죄한 브란트 총리 이지만 그가 체결한 중요한 협정이나 조약에는 소위 ‘통일을 위한 서신(Brief zur Einheit)’ 이라는 것이 첨부되어 있다. 서신의 내용인 즉,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유럽의 안보를 지키고 독일민족이 스스로 결정할 독일통일의 염원과도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Berlin wird leben. (베를린은 살아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Jetzt waechst zusammen, was zusammengehoert.

        (하나이던 것이 이제야 비로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구나)


통일 전후 브란트 수상의 이러한 짤막한 문장 속에는 국민의 고통을 품안에 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넒고 큰 정치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아마도 모든 독일인의 가슴 속에서 이 두마디 문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세 정치인이 이루어낸 역할을 보며 비전을 일깨우는 정치, 바른 정치는 반드시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그 정책의 현실감과 추진력도 매우 클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게된다.

I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