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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카디르 칸과 북한의 핵 밀거래

박상봉 박사 2005. 12. 12. 08:41
 

슈피겔의 커버스토리1 (04/1/16)

압둘 카디르 칸과 북한의 핵 밀거래


- 편집자 註: 독일의 최대 시사주간지 데어 슈피겔(Der Spiegel)은 북한 핵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보도하고 있다. 특히 2004년과 2005년 초에는 북핵을 커버스토리로 선정해 심층보도를 한 바 있다. 슈피겔이 보는 파키스탄과 북한 핵의 국제적 파장을 2회에 나누어 소개한다. -


독일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파악하는 북한 체제는 독재체제이다. 김정일에는 독재자라는 호칭을 거의 예외없이 사용하고 있고 북미 간 제네바 핵 합의가 파기된 이후 북핵에 대한 위험성을 매우 심각하게 보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보도가 2004년 1월 26일자 보도로 당시 슈피겔은 북한의 핵 밀거래 사실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슈피겔은 이 심각성을 국제원자력 기구 IAEA 알바라데이 사무총장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해 보도하고 있다. “북한, 이란, 리비아가 이미 파키스탄의 핵 대부로부터 핵기술을 전수 받은 이후 누가 다음 차례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핵무기가 비양심적 독재자들과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매우 두렵다”

양심을 파는 학자, 스파이, 브로커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검은 컨넥션의 존재로 국제적 핵기술의 암거래는 아직도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유엔 통제 하의 핵확산 통제 매카니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작년 12월 6일 핵 위기라는 제하에서는 알바라데이 사무총장을 인용해 북한이 이미 6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무사라프 대통령과 핵 영웅


파키스탄의 핵 대부 압둘 카디르 칸은 국민적 영웅이다. 그는 대량살상무기야 말로 ‘평화의 무기’라고 여기고 자신은 애국자요 모든 모슬렘의 전사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을 포함한 서방세계는 파키스탄의 적이자 모든 이슬람의 공동의 적이다.

최근 파키스탄 정부는 칸의 주변인물들을 핵기술 유출혐의로 잇따라 체포해 조사하고 있지만 무샤라프 대통령이 국민의 핵 영웅인 칸을 직접 체포해 조사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1999년 10월 군사 구테타로 집권하게 된 무샤라프 대통령은 8명이나 되는 핵 대부의 측근 기술자들을 체포하던 날 의회에서 “우리의 핵무기는 파키스탄의 안보에 기여하고 있다”고 연설해 박수갈채를 받았던 반면, “파키스탄은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며 핵무기의 해외유출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는 회의장이 술렁이며 여기 저기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의회 연설이 있은 직후 이슬람 정당의 의원들은 “대통령이 미국의 하수인”이라고 떠들어 댔고 체포된 핵 기술자 가족과 변호인단은 단체행동을 벌여 무샤라프 대통령을 압박했다. 파키스탄 내 급진주의자들은 9.11 사태 후 미국의 편에 서서 탈리반과 알카에다 테러단체에 대한 반격에 나섰던 무샤라프에게 집단적으로 포화를 내뿜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무사라프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두 차례나 가까스로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 현재 이슬람 세력들은 무사라프 대통령의 강력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군과 비밀경찰 ISI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키스탄 내 반(反) 서방 급진세력들은 무사라프 대통령이 미국의 FBI나 CIA 요원의 활동을 묵인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는 한편, 미국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이슬람 급진세력과 비밀리에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다고 항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사라프 대통령의 권력도 외줄타기와 같이 위태로운 가운데 그의 처지가 안타깝다.


핵 대부, 압둘 카디르 칸


파키스탄의 핵 영웅인 칸은 인도에서 출생해 소년기를 보냈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였던 칸의 가족이 인도를 떠나 파키스탄으로 이주한 것은 그가 16살 때였다. 칸의 가슴 속에는 인도의 힌두병사들이 여성에게 강도 짓을 했던 기억과 국경에서 칸이 입학시험을 위해 형이 선물한 볼펜을 그들에게 빼앗긴 기억이 마음 속의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카라치에서 대학을 마친 칸은 학업성적이 뛰어나 서베를린 공대에 장학금을 받고 유학길을 떠났다. 공대를 마치고 네덜란드 델포트로 이주해 금속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1972년에는 벨기에 로이벤 카톨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료들은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천재적 기술자라고 말해왔다. 뿐만 아니라 칸은 탁월한 언어감각을 소유하고 동료나 교수진들을 놀라게 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칸 박사는 영국, 독일, 네덜란드 3국의 원심분리기 제조회사인 Urenco에 입사했고 곧바로 핵 정제시설을 건축 중인 네덜란드 알메로로 파견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기술자들의 꿈이기도 한 핵 점화기술을 익히게 되었고 우라늄, 플루토늄 등 핵연료를 추출하는 핵무기 제조기술의 모든 것을 배웠다. 독일은 60년대 말 전문용어로 G-1과 G-2라는 두 가지 타입의 원심분리기술을 개발했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 3국의 컨소시엄으로 구성된 Urenco사는 이러한 원심분리기술 등 핵 기술 관련용어들을 번역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녔던 칸은 이 과정에서 늘 핵심적인 일을 맡게되었다. 그는 원심분리기술과 관련된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서류들을 접했고 종종 이 서류들을 사적으로 지니고 필요한 서류들을 복사했다. 


1976년 어느 날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칸의 아내는 회사에 남편이 아파 출근할 수 없다고 연락을 취했고 우렌코 사는 칸이 이미 파키스탄으로 귀국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때는 늦었고 칸은 파키스탄에서 유럽에서 습득한 핵 관련 기술을 바탕으로 연구소를 세웠다.


21세기 빈국의 로빈후드


칸 연구소는 1985년 최초로 우라늄을 정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앞서 칸 박사가 비밀리에 귀국한 지 7년이 되던 1983년 암스테르담의 한 법정은 칸의 부재 하에 심리를 열고 그에게 산업스파이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한 바 있다. 하지만 칸은 우라늄 정제기술 관련 서류들을 복제한 바 없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칸 연구소는 산유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리비아, 오랫동안 동맹국이었던 중국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소위 “이슬람 폭탄”이라는 프로젝트를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핵 기술은 이 과정에서도 비밀리에 북한, 이란, 리비아는 물론이고 이미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을 한 여러 나라에 광범위하게 거래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서방의 정보요원들과 엘 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국제사회의 핵 확산 저지 시스템은 실패했음을 선언했고 새로운 통제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으면 핵전쟁의 가능성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주장이다. 핵기술 암거래의 최초 주자는 이란이다. 독일의 연방정보국(BND)는 이란이 우라늄 정제기술을 개발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1987년 파키스탄으로부터 관련기술을 들여온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란에 대한 유럽의 핵 통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소련 붕괴로 인한 핵무기의 무절제한 확산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핵 유출혐의는 사담 후세인이다. 이것은 후세인에게 핵 기술을 제공했다는 두바이 출신의 브로커가 쓴 한 편지에 칸의 이름이 거명된 것으로 유추되었으나 추후 이는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담 후세인과의 거래보다 확실한 핵 기술 유출 건은 북한으로의 핵 기술 유출이다. 1992년 칸은 십여 차례 평양을 방문해 독재자 김정일을 만났다. 여기서 김정일은 사정거리 1,500km에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노동 미사일을 원심분리기술과 교환할 것을 제의했다. 이후로 1997년부터 북한은 무기에 사용 가능한 우라늄 정제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고 파키스탄의 미사일 기술도 큰 도약을 이루었음이 보여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칸의 개인적 영예는 1998년 5월에 찾아왔다. 인도가 핵실험을 성공한 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아 파키스탄도 사가이 산에서 핵실험에 성공을 거두웠던 것이다. 그는 파키스탄의 민족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칸의 야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21세기 핵 시대의 로빈 후드라며 빈곤한 제3세계 국가에 핵기술을 전수하고자 했다. 아직까지 칸의 핵 기술이 알 카에다 등 테러단체의 손에 들어갔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핵무기에 대한 집념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칸을 매개로 한 핵 기술 유출이 드러나게 되자 그는 스스로 자신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하루 밤 사이에 아내와 대북 협력자 강태윤을 잃고 말았다. 살해된 것이다. 이들이 북한과의 핵 거래의 비밀을 밝히려 했고 이에 따라 평양정권이 암살지령을 내려 살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칸은 광범위한 외부의 손님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방장관은 칸의 연구시설을 돌아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현재 파키스탄 정부는 칸 연구소를 둘러싼 인물들을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영웅인 칸을 직접 체포해 조사하기는 쉬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2,20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고 2억7천만 달러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다. 막대한 유엔산하 국제기구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다. 알 바라데이 사무총장 스스로 슈피겔 지와의 인터뷰에서 “국제원자력기구의 역할이 한계에 이르렀다. 새로운 통제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곧 핵전쟁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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