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재건

통일외교

박상봉 박사 2005. 10. 29. 08:22
 

성공적 경제통합을 위한 개념8

통일외교


우리나라 통일외교의 과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에게 남북통일이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설득하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동안 우리정부가 보여왔던 통일외교는 낙제다. 통일의 과정에서 현재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북핵 문제에 대한 대응도 신통치 않아 보인다. 최대 피해당사국이면서도 미국과 북한의 중재자임을 자처했던 것도 그렇고 이런 혼란기에 전통적인 한미일 동맹을 바탕으로 중국과 러시아와 선린우호관계를 맺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의 외교는 우왕좌왕의 모습이다. 


한편으로 전통 우방인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대한정책도 우리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 같지 않다. 특히 최근 한국에서 일고있는 반미감정은 우려할 만하다. 중국조차도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데 우리의 젊은이들은 성조기를 불태우며 반미정서를 부추기고 있다.

게다가 우리정부는 자주국방을 거론하고 있다. 전쟁의 개념이 변화하고 테러집단의 도발이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집단안보체제가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으로 채택되고 있는 추세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자주국방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소규모 테러집단의 테러가 국가안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 속에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추어 테러와 안보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지 않고서는 국가안보가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는 실험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요, 그렇다고 립 서비스의 대상은 더욱 아니다. 안보는 현실이다. 통일된 독일의 방위도 집단안보동맹인 나토(NATO)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섣부른 자주국방론, 반미 제국주의 시각과 반일 감정은 우리나라 안보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중국에는 왜소하고 초강대국이자 전통 우방인 미국에는 한없이 교만한 태도로는 우리의 통일외교는 성공할 수 없다.

“중국은 대국(大國), 북한과의 동맹국”이라는 패배주의적 발언이 아니라, ‘변하고 있는 중국’, ‘탈북자의 강제송환을 중지하고 난민으로 인정하게 될 중국’, ‘동독인들에게 탈출로를 열어준 제2의 헝가리가 될 중국’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외교이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순리이자 독일통일의 또 다른 교훈이다.


1) 국제사회의 대북관

국제사회에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북한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은 국제사회에 마지막 스탈린체제를 고수하는 세습권력의 독재자 김정일이 통치하는 불량국가로 알려져 있다. 마약, 위조달러를 제조해 불법 유통시키는가 하면 일방적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해 핵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다. 심지어 미국을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있다.

2003년 6월 12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미국, 일본 등 11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대량살상무기의 이송을 통제하기 위한 대량살상무기방지구상(PSI)을 설치키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훈련을 실시해 왔다. PSI 회원국들은 작년 10월 런던에서 도상 항공저지 훈련 등 3차례 훈련을 실시했고 11월과 12월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각각 주최가 되어 지중해 훈련과 항공저지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또한 2004년 초에는 폴란드에서 육상훈련과 독일 주최 국제공항 저지훈련과 미국주최 아라비아해 훈련이 계획되어 있다. 이런 일련의 훈련을 통해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호주 등 11개국은 불법 유통되는 대량살상무기를 완전하게 금지시킨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 2004년 1월 9일에는 캐나다, 덴마크, 노르웨이, 싱가포르, 터키가 추가로 PSI에 서명해 서명국은 총 16개국으로 늘었고 곧 러시아도 서명할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우리사회는 이러한 국제사회의 대북관을 억지로 외면하고 있는 듯 하다. 북핵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을 보는 시각도 세계 주요언론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계 주요언론들의 보도가 북한을 초점에 두고 핵을 개발하려는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며 “북한 핵이 실제로 한반도와 국제사회에 어느 정도 위협이 될 것인가”와 같은 내용인 반면, 국내언론들의 보도는 주로 미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강온파의 갈등과 북한에 대한 공격 등과 같은 지엽적인 것들을 마치 특종이나 잡은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조에는 ‘북한은 약자, 미국은 강자’라는 구도가 깔려 있음이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보도 태도야말로 우리를 스스로 국제사회의 본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국제공조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하는 일이다. 미국 언론은 그렇다고 하고 6자 회담과 관련된 독일언론의 보도만을 봐도 이런 현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우선 북한에 대한 주요 독일언론의 공통적인 특징은 김정일에 대한 보도에는 늘 ‘독재자(Diktator)'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는 것이다. 이번 보도에도 김정일은 어김없이 독재자라는 호칭과 함께 등장하며 보도 제목도 북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독일 최대 시사주간지 슈피겔(Spiegel)은 온라인을 통해 “평양, 석유 전기공급 및 불가침 협정요구”, “北, 핵실험 선언”라는 제목으로 6자 회담을 보도했고 사이버 토론도 벌였다. 토론 제목 역시 “북한은 핵 갈등을 어디로 몰고 갈 것으로 보십니까 ?”였고 편집자 주에서도 “이라크 무기 보다 더 위협적인 것으로 알려진 북한을 통치하는 독재자 김정일은 타협적이지 못하며 적극적인 대화에도 임하려 하지 않는다”고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핵 갈등이 얼마나 위험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 “중국의 대응은 ?”, “국제공조를 통해 북한정권과 핵 위협을 제거하는 일이 용이할 것입니까 ?”와 같은 질문들이다.


2) 중국의 국익

이번 6자 회담을 통해 가장 달라진 나라는 중국이다. 후진타오 주석 등장 이후 실용주의 노선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대미 우호관계를 깨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중국의 대미 수출은 급격히 증가해 미국의 중국상품 점유율이 이미 10% 대에 달했다. 우리 상품의 대미 점유율이 사상 최초로 2%대로 떨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6자 회담이 성사된 것도 “전쟁 준비 그만하라”는 후진타오의 강경한 입장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중국은 2008년에 베이징 하계올림픽과 2010년에는 상하이 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려 하고 있으며 경제성장과 함께 국제사회의 규범을 준수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이미 국제인권단체들은 탈북자의 강제송환과 국제난민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중국에 대해 올림픽 보이코트를 선언하고 나섰으며 자크 로케 IOC 위원장도 탈북자 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에 부정적이다.


이런 국제적 요구를 무시하고 중국의 북한 김정일 편들기가 계속되리라고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달 27일 중국의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관리들은 북한 정부에 빈사상태의 경제에 대한 개혁을 시작하라고 항상 촉구한다”고 보도한 바 있고 중국 내부로부터 최근 중국이 북한 붕괴에 대비한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이에 반해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북한은 변할 수 없다. 이런 북한을 지지한다는 것은 중국의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중국도 과거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호네커의 손을 놓은 것처럼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김정일에게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몰락으로 인한 남한 주도의 통일에는 반대할 것이다. 통일된 한반도에 친미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며 북한 내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은 김정일 정권을 친중국 정권으로 교체해 분단을 고착화하고 한반도에 영향력을 장기간 행사하려 들 것이다.


3) 고르비, 호네커에 등 돌려

1989년은 동독이 건국 4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 해는 또한 동독 공산당이 최초의 조직적인 국민저항에 부딪쳤던 해이기도 하다. 국민들의 저항은 그 해 8월부터 조직적인 동독 탈출을 감행함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전통 야당도시 라이프치히로부터 시작된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에서 반공산당 투쟁을 선언하는 구호들이 등장함에 따라 본격화 됐다.

이 해 10월 7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차 동베를린을 방문 중 이었다. 당시 호네커 총서기는 국민들의 개혁 요구에도 불구하고 건국 기념행사를 또 다시 동독 공산당 선전의 장으로 활용한다는 데 변함이 없었다. 군사 퍼레이드가 진행됐고 동독 탈출자들은 서독 정부의 프로파간다(흑색선전)에 의해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들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날 고르비(고르바초프의 애칭)는 기념연설에서 호네커를 향해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그의 노선을 비판했다. 이 연설은 그대로 적중되었고 결국 호네커는 12월 3일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리고 칠레로 망명해서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역사의 순리에 순응해지 못했던 대가를 철저히 지불했다.

그가 재임 시 탄압했던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고 모스크바로 도주할 수 있었던 것도 권력 상실 후 구차한 한 독재자의 진면목이었다.


4)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  

전후 서독의 대동독 정책은 할슈타인 독트린으로 대변된다. 서독정부 만이 대외적으로 유일한 대표성을 지니며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정책이었다. 이와 같은 대동독 정책이 큰 전환점을 맞게된 것은 빌리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부터이다. 그는 신동방정책을 기치로 나치에 희생된 폴란드 영령에 무릎을 꿇어 국제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일조하는 한편, 동독과는 기본합의서를 체결하여 양독 간의 대화채널을 만들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성공적으로 추진되었고 양독은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영원히 평화공존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러한 모습 뒤에는 공산독재 정권 하에서 억압받아온 수많은 동독인들의 눈물과 고통이 감추어져 있었다. 동독탈출은 이에 대한 동독인들의 최소한의 저항이었고 서독정부는 이를 따뜻하게 포용해 주었다.


해마다 평균 20만명에 달하는 동독인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서독에 이주하였고 동독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한달 만에 세우는 이벤트도 연출하였다. 경제적 차원의 동독 탈출은 서독 마르크화에 대한 동독사회의 갈망으로 나타났다. 서방세계의 경화가 필요한 동독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서독의 마르크화를 챙겼고 서독은 동독인의 생명을 지키고 행복을 약속하는 일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였다. 동독 정부가 귀찮다고 서독으로 보내는 노인네와 병약자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였고 정치범들을 1인당 평균 9만 마르크씩 지불하고 분단 중 총 3만 3,577명을 석방시켜 서방으로 이주시켰다. 이렇듯 동서독 간 평화공존의 겉모습 뒤에는 분단으로 얼룩진 고통과 대립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고통과 대립이 전면으로 등장해 분단의 역사를 마감하는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1989년 가을의 일이다.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추진하였고 서방세계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운 삶에 많은 동독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동독인의 엑소더스가 시작되었고 양독 간 통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8월 8일 최초로 131명의 동독주민이 동베를린 소재 서독 대표부에 진입을 시작으로 동유럽 내 서독대사관에는 연일 몰려드는 동독사람들로 장사진이었다. 대사관의 뜰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텐트로 꽉 차 있었고 점점 증가하는 이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대사관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동독 탈출의 절정은 8월 19일 헝가리 민주단체와 범유럽 유니온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개최했던 한 행사장에서 벌어졌다. 이 행사를 위해 헝가리 정부가 국경을 서너 시간 개방하게 되었고 이를 틈타 900여명의 동독 청년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였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이후 가장 대규모의 탈출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독과 서독정부는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 이라고 불리는 한치의 양보도 허용할 수 없는 한판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대상은 헝가리 정부였고 목표는 대(對) 오스트리아 국경의 개폐 여부였다. 동독은 1969년 헝가리와 맺은 통행협정을 근거로 헝가리의 오스트리아 국경개방을 적극 반대함은 물론 헝가리의 네메츠 수상과 호른 외무상에게 사회주의 동맹관계를 강조하고 만약에 헝가리가 국경의 개방조치를 취한다면 외교단절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동맹관계가 유지될 수 없음을 상기시켰다. 이와 더불어 동독정부는 헝가리로 향하는 경유지인 폴란드, 체코의 국경을 통제하였다.

이에 반해 서독정부는 자유를 찾아 고향도 등지고 탈출하고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은 같은 민족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임을 설득하였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헝가리 정부로 하여금 대(對) 오스트리아 국경을 지속적으로 개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외교전이 얼마나 치열하고 역사적이었는가는 당시 헝가리 총리와 외무상을 지냈던 호른 외무상의 고백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고백은 당시 독일의 최대 시사주간지 데어슈피겔 지에 게재되었고 호른 외무상은 무려 7, 8페이지에 달하는 당시의 역경의 순간들을 피력하였다.


결국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은 도덕적으로도 월등하고 경제력도 강한 서독의 승리로 끝났고 헝가리가 국경개방을 결정한 순간부터 2달간 무려 2만여 명의 동독인들이 자유세계의 품에 안겼다. 이것이 인도주의의 승리이고 인권․생명 등 인류 보편적 가치의 승리인 것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베를린 장벽은 철거되었고 통일이 길이 활짝 열렸다. 1989년 11월 9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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