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재건

보수와 진보

박상봉 박사 2005. 10. 27. 17:30
 

성공적인 경제통합을 위한 개념7

보수와 진보


본질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국가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의 역할과 과제가 주어져 있다. 진보의 역할이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고 한다면 보수는 그 방향으로의 진행이 국가에 커다란 부담이나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진보가 없는 보수는 사회를 정체에 빠뜨리게 될 것이며 반대로 보수 없는 진보는 극심한 혼란과 혼돈이 이어져 사회가 급격히 퇴보하고 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발전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는 상호 보완적이자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슈뢰더 정권에서 연정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는 녹색당의 태동과 발전의 과정은 한나라의 이념논쟁의 역할에 중요한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지난 70년대 녹색당이 ‘얼터너티브 리스트(Alternative List)’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을 때 이 조그만 정치집단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녹색당이 현재 사민당 슈뢰더 정권에 연정으로 참여해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를 배출했지만 당시 얼터너티브 리스트는 환경운동을 하는 조그만 정치집단에 불과했다.

이들의 초기정책은 베를린을 포함한 대도시에 자동차 운행을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소방차, 응급차, 경찰차 등 긴급구호와 치안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차량을 제외하고 도시 전체를 ‘차없는 거리’로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시민들의 운행은 자전거를 비롯한 무공해 운행수단에 의지하자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주장인 것 같았지마는 사람들은 이 주장에 박수를 보내고 이 기발한 아이디어의 본산지인 얼터너티브 리스트를 지지해 주었다. 이 정치적 소그룹을 지지해 준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없긴 하지만 여기에 담긴 아이디어는 높이 평가해 줄만 하다는 판단 하에 이들의 정치생명을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 이 소그룹이 지지율 5%을 획득해 원내 진출이 가능해 지기까지는 20여년이 세월이 지나서였다. 이제 이 그룹은 녹색당으로 개명하고 지지율 10% 내외에 육박하는 주요 정당이 되었고 사민당과 함께 연정을 할 정도로 성장했다. 녹색당의 출현과 성장은 향후 독일이 어떤 정책적 결정들을 지향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환경파괴가 심각해 지구온난화가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 속에서 향후 국가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이끄는 역할이다. 이렇듯 한 나라의 발전과정에서 진보의 역할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일고 있는 보수 대 진보의 논쟁은 이미 그 역할을 망각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배제하고 극단적인 주장만이 난무하고 있고 이로 인한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특히 한반도와 같은 분단상황에 처해있는 나라에서의 진보의 역할은 더욱 정교하게 점검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자칫 진보의 요구와 주장들이 대립된 상태에 있는 북한의 선전․선동의 구실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보세력들이 주의해야할 사항은 그들의 주장과 요구가 북한에 의해 악용되는 것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이다. 특히 북한이 남한의 자칭 진보세력들을 조정하거나 실제로 남한사회를 교란할 목적으로 공작원들을 파견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이념대립의 실체

일반적으로 이념과 체제로 분단된 국가에서 활동하는 극우나 극좌단체는 상대방 국가의 지원과 조정을 받게 된다. 이 경우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국가에서의 극좌단체의 활동이 훨씬 자유롭고 위협적임을 알 수 있다.

서독의 극좌단체였던 RAF(적군파)는 결국 동독 슈타지의 후원을 받고 암약해 왔고 동독의 몰락과 함께 독일 땅에서 사라진 단체이다. 이렇듯 이념적으로 대립된 분단체제 하에서 극단적 단체들은 분단 상대국의 지원을 받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한에서 활동하는 극좌단체나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우단체는 북한이나 남한의 정보기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북한의 경우 폐쇄통제 체제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극우단체들의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한사회에서의 극좌단체는 얼마든지 북한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이 가능하다. 이들은 군사독재에 의해 추진된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대기업 위주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피해를 본 세력들의 불만을 악용해 남한 내 불안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이들은 우리사회가 북한의 선전과 공작에 넘어갈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낙관론을 경계하고 있다. 독일의 헌법수호청 홈페이지에는 민주주의는 그 자체에 적을 포함하고 있다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거듭 주지시키고 있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는 체제전복 세력으로부터 헌법을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교훈하고 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가장 큰 위기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과 친북극좌단체들의 주장이 구별 없이 통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친북단체들은 사회를 보수와 진보로 이원화해 사회적 갈등을 유도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서독 콜 총리의 특별안보보좌관으로 89년 동독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동서독 통일의 기회를 움켜잡고 역사적 통일을 이끌어낸 호르스트 텔칙 박사는 분단시절 서독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독의 고정간첩과 그 동조세력들이 3만명에 달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3만명 정도의 고정간첩은 분단국이라는 특성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며 이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자본주의 서독을 보다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미 너무 많은 간첩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모두 소탕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 대신 서독은 모든 분야에서 동독보다 월등한 사회를 만들었다. 주) -동서독 통일 직후 독일을 찾은 소련의 학자들은 사회주의가 추구하던 사회건설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서독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실현되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


결과적으로 3만명의 친 동독세력들은 서독사회를 교란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베를린 장벽을 오가며 사람들은 동독의 사회주의 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족들의 삶의 실체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양측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서독인들이나 독일을 찾은 외국관광객들은 베를린 장벽을 따라 산책을 즐기기도 하고 장벽 주변에 설치해 둔 전망대에 올라 장벽 넘어 동베를린의 모습을 이리저리 바라다보곤 했던 반면, 장벽 동편에는 50미터 단위로 초소가 세워져 주민들의 장벽 접근을 엄격히 금했다.

전망대를 통해 바라다 본 동베를린은 그야말로 회색지대였다. 지프차나 검은색 세단만이 이따금 씩 회색 지대의 정적을 깼고 제복을 입은 국경수비대의 모습은 차가왔다. 또한 초소에 내밀어져 있는 망원경을 보면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동서독의 상황을 통해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남한에도 적지않은 수의 북한 스파이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분단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서독과 우리가 다른 점은 서독인들은 동독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동독은 언젠가 서독과 통일을 이루어 함께 풍요롭게 살아야 하는 나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독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는 동독과 무관한 일로 서독인들이 해결해야할 사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남한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에 대한 대안을 북한에서 찾으려 한다. 이런 가운데 남한의 보수는 북한과의 공조를 통해 청산해야할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2) RAF와 로베더

RAF(적군파)는 1968년 프랑크푸르트 소재 백화점 두 곳을 방화하는 것을 시발로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초기에 체포된 안드레아스 바아더의 무장 구출 작전을 성공시킴에 따라 반제국주의 무장투쟁을 본격화했다. 이들의 무장투쟁은 라틴 아메리카의 도시 게릴라 전법을 모형으로 서독의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에 대한 투쟁을 전개해 대중을 혁명세력으로 유도한다는 목적 아래 이루어졌다. RAF는 제3세계 해방운동 세력들과 연계되어 있었고 극좌단체인 팔레스타인 의용군으로부터 무장훈련을 받기도 했다.

RAF는 서독에서 자생한 극좌테러 단체였으나 70년대 말 바아더를 비롯한 핵심세력들이 독일 항공 루프트한자의 납치에 실패한 후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바아더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슈트트가르트 슈탐하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RAF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마인호프도 감옥 내에서 자살하자 남은 세력들이 구 동독으로 잠입해 활동을 해오다 통일과 함께 일망타진되었던 친동독 극좌조직이었다.


RAF는 드레스덴 은행 대변인이었던 폰토와 서독의 대표적인 전자회사인 지멘스의 연구소장이었던 벡쿠르트를 암살했으며 80년대에 들어 도이치 뱅크의 대변인이었던 국제금융 전문가 헤어하우젠을 살해했다. 그리고 동독이 몰락하자 동독 경제재건의 주역이었던 트로이한트의 대표인 로베더를 테러 살해한 것이다.

RAF 소속 테러리스트들의 특징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날카롭고 논리 정연한 비판능력을 갖춘 지식인들이라는 데 있다. 만약 이들의 테러행위를 간과한다면 RAF는 많은 대중의 인기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슈탐하임”이라고 하는 영화가 지난 80년대 중반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했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RAF는 동독의 슈타지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또한 슈타지는 적군파 이외에도 여러 외국의 테러단체를 지원해 왔다. 슈타지 총수였던 에리히 밀케의 산하에 교육기관을 두어 무기사용에서부터 폭발물 설치 요령, 유도, 가라데 뿐 아니라 철저한 이데올로기 교육까지도 시켜왔다.


동독이 몰락하자 슈타지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슈타지 요원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과거의 범죄행위에 대한 법의 심판을 받은 후 남은 여생을 조용히 살아가는 일이 최선이었으나 이들 중에는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었다. 이것이 로베더의 암살을 초래한 것이다. 로베더의 임무는 그들의 권력의 기반이 되었던 국가재산을 개인에게 사유화시킴으로 동독을 완전해체하여 흡수통일을 완성하려는 작업이었다. 이것이 슈타지로 하여금 적군파를 조정해 로베더를 암살토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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