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패러다임과 북한재건

동서독 화폐통합 (포퓰리즘 vs. 신(神)의 한수)

박상봉 박사 2017. 5. 26. 18:27

동서독 화폐통합

(포퓰리즘 vs. ()의 한수)

 

20155월 말 독일통일의 주역 3명이 6ALC(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콜 총리의 특별안보보좌관이었던 호르스트 텔칙, 9대 대통령을 지낸 호르스트 쾰러 그리고 페터 하르츠 전 노동개혁위원장이다. 특히 쾰러(CDU)와 하르츠(SPD)는 노동 및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소속 정당 지지층 성향과 정반대의 정책을 통해 통일의 부작용을 해결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쾰러는 통일 당시 경제성 국장으로 콜총리의 통일 작업을 보좌하며 화폐통합을 주도한 인물이다. 화폐통합은 동서독 화폐의 교환비율을 두고 심한 논쟁을 초래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실질 가치가 1/4에도 못 미치는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화폐와 1:1로 교환한다는 정책을 수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쾰러는 이런 화폐통합을 전격 단행했고 연방은행 총재였던 칼 오토 푀엘은 이를 반대해 총재직을 사임했다.

그렇다면 콜 총리는 왜, 이와 같은 다분히 정치적 화폐통합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동독인들의 대량 이주 때문이었다. 콜 총리가 이러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독일은 더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월요데모를 통해 무혈혁명을 이루어낸 동독 주민들은 통일을 강력히 요구하며 서독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분단 시절 베를린-서독 구간을 오가며 동경해왔던 막강한 서독 경제력과 마르크화를 향한 발길이었다. 그들은 “Wenn DM nicht zu uns kommt, dann kommen wir zur DM” (만약 서독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 마르크화를 찾아갈 것이다)라며 자유와 풍요로움을 동경했다. 이미 1989년 하반기에만 50만명 가량의 동독 탈출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던 콜 정부는 대량 이주를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화폐통합은 이런 상황 속에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장의 카드였다. 동독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자유와 풍요로움을 체감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콜 총리는 또한 통일을 가능하게 한 동독 주민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다. 전쟁 범죄와 홀로코스트로 얼룩진 비극의 독일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바꾸고 불가능했던 통일의 문을 열어준 동독 주민에게 보답해야 했다. 이런 이유에서 콜 정부와 쾰러국장이 추진했던 화폐통합은 정치적 포퓰리즘을 넘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화폐통합으로 동독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줄도산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어차피 경쟁력이 없었던 동독기업의 도산은 예정된 것이었다.

페터 하르츠는 통일 후 콜 정부의 8년 임기가 끝나고 총리에 오른 사민당 슈뢰더 정권 하에서 노동개혁 위원장을 역임했다. 매년 100조원에 가까운 재정을 투입했지만 동독 재건사업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하르츠는 진보 정당의 주요 지지자인 노조의 집단 이기주의에 제동을 걸고 복지 재정을 과감하게 줄이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실업급여를 줄이고 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는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실업자들을 위한 다양한 창업 아이템도 개발해 고용을 창출해 나갔다.

이런 일련의 정책을 보며 국가의 위기 앞에 여야가 따로 없는 독일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보수적 가치를 대변해온 기민련이 정치적 화폐통합을 추진하고 진보 정당 사민당이 반 복지정책을 단행해 통일로 인한 부작용을 해결해낸 것이다. 언론이 통일을 브란트가 시작해 콜이 마무리한 것이라고 보도했던 것도 이런 국가적 현안을 대하는 여야 정치인의 초당적 자세를 엿보게 한다.

텔칙 보좌관이 담당했던 콜 총리의 드레스덴 선언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포퓰리즘을 포기했던 사례로 꼽힌다. 콜 총리는 198911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40여일 만인 1218일 동독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동독 무혈혁명을 주도했던 작센 주의 주도(州都) 드레스덴에는 콜 총리를 영접하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동독 주민들은 헬무트, 헬무트!”를 연호했으며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하나)라며 통일의 구호를 외쳐댔다. 드레스덴 방문 전 콜 총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동독 주민들에게 어떤 연설을 해야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 전승국은 물론 유럽 모든 나라가 연설 자귀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 뻔한 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동독 주민의 사기도 올리고 통일의 염원도 담아낼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었다.

만약 동독인들을 향해 통일을 주문하기라도 하면 주변국들의 경계를 불러와 통일의 역사적 기회를 망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내고 무혈혁명을 이루어낸 동독 주민들에게 맥빠진 연설을 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드레스덴 방문을 포기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텔칙의 회고록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결국 드레스덴을 방문한 콜 총리는 동독 주민을 향해 여러분!, 자유를 위해 싸우십시오..... 신의 가호가 함께 할 것입니다라며 자유의 가치를 주문했다. 유럽과 국제사회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독일 통일의 기적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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