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패러다임과 북한재건

동독 무혈혁명

박상봉 박사 2017. 3. 23. 10:42

동독 무혈혁명

 

독일통일은 시민과 시민단체들이 이루어낸 역사다. 1989년 여름 동독의 무혈혁명은 전통 야당 도시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촛불기도회(Friedensgebet)에서 시작되었다. 1981년 시작된 촛불 기도회는 동독 공산정권의 폭력에 반대하는 소박한 모임이었다. 촛불 기도회가 공산당 저항운동의 메카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89년 부터였다. 소련에서 시작된 개혁·개방의 흐름이 동유럽을 넘어 동독에 도착하며 본격적인 반공산 운동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198994일 월요일은 촛불 기도회가 민주적 시위로 바뀐 첫 날이었다. 기도회를 마치고 1천 여명의 참석자들이 “Stasi raus! 슈타지 사라져라!”라며 거리로 나섰다. 서독 여행을 막으면 탈출도 불사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컸다. 슈타지의 무력 진압이 시작되었고 시위를 주도했던 70여명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동독 주민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매주 월요일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동독의 역사를 바꾼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가 본격화되었다. 109일 월요데모에는 7만명이 모여들었다. 시위대들은 비폭력!’을 연호하며 슈타지에게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베를린 겟세마네 교회도 저항운동에 동참했으며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데모가 베를린,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되었다.

1016일 월요데모에는 12만명이 참가했다. 시위구호도 우리가 주권을 가진 국민이다라는 의미의 “Wir sind das Volk! 우리가 국민이다에서 통일을 요구하는 “Wir sind ein Volk! 우리는 한 민족이다!”로 바뀌어갔다. 동독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변하고 통일운동으로 승화되어갔다. 다른 한편 폴란드나 체코 주재 서독 대사관에 진입한 동독 주민들의 탈출 소식이 전해지며 시위대의 사기도 고조되었다.

이렇듯 대내외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지만 호네커는 10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건국 행사에는 소련의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참석했다. 고르바초프는 40주년 축하연설에서 호네커의 기대와는 달리 “Wer zu spä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인생이 늦게 동참하는 자를 벌하게 될 것이다라며 개혁의 시기를 놓치지 말 것을 설득했다. 하지만 호네커는 기념 연설을 통해 과거 40년 동안 동독이 이룩한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고 동독인의 탈출과 월요데모는 서독 정부의 프로파간다(흑색선전)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게 번졌고 19891018일 호네커 서기장이 사퇴해야 했다. 사통당 정치국은 1989118일 자로 폐쇄되었으며 1989123일 호네커는 사통당에서 출당되었다. 호네커가 축출되고 공산당의 영향력이 급락하자 시민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이 중심되어 시민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뉴포럼’(Neues Forum)1),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 ‘민주봉기’(Demokratischer Aufbruch) 등과 같은 시민단체들이 조직되어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지금1989912일 민주주의 개혁과 우리 일은 우리가라는 주민의 정치 참여를 내세우며 설립되었다. 민주주의 지금은 사통당, 교회, 시민운동, 위성정당 등이 참여하는 ‘4자 회의를 열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이것이 후에 원탁회의로 발전했다. 사통당(SED)의 주도적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뉴포럼(Neues Forum)은 동독 내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교회 밖 최초의 재야운동이다. 1989919Neues Forum은 내무성에 정치단체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동독 호네커 정권은 반국가단체라는 이유를 들어 수용하지 않았다.


동독 헌법 1조를 개정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2달 만에 75천명의 서명을 모았다. 민주주의 지금은 19901월 정치 참여를 공식 선언하고 318일 자유선거에 동맹 90의 일원으로 출마했다. ‘민주봉기198910월 시민단체로 조직되었고 12

월에는 창당을 위한 전당 대회를 열고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초대 총재에는 변호사 볼프강 슈누어가 선출되었다.

민주봉기는 정당 프로그램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추구할 것과 정당의 목표로 통일을 내세웠다.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지 못했던 리더들이 떠나고 반공 개혁주의자 앙겔라 메르켈이 대변인, 오스발드 부츠케가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통일 후 1989년 동독 무혈혁명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있었다. 동독 시민들의 저항운동에 서독 사회의 직·간접적 반응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중했었고 그것은 동독 사통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의 개방 개혁을 지원하고 동독 시민단체에 힘을 실어주어 사통당을 스스로 개혁에 동참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90318일 동독 땅에 자유선거가 실시되었고 역사 상 최초의 민주정권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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