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패러다임과 북한재건

동서독 기능주의적 접근

박상봉 박사 2017. 3. 20. 10:03

동서독 기능주의적 접근

 

예멘의 기계적 합의통일이 실패로 끝난 것과 마찬가지로 서독의 초기 기능주의적 접근은 기대와 달리 동독 공산정권을 붕괴시켰다. 독일의 사례에서 우리는 경제적 격차가 큰 상이한 체제 사이의 기능주의적 접근은 상대적 약자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시작으로 대동독 정책의 기조는 Wandel durch Annährung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동서독 교류가 활성화되었고 동독 외딴섬 베를린을 왕래하는 구간에는 차량이 넘쳤다. 청소년, 문화, 스포츠 교류가 활발했고 동서독 간 방송협약으로 TV 시청도 가능했다. 심지어 동독인 대다수가 서독 TV8시 뉴스를 가장 신뢰한다고 밝힐 정도였다.


분단 시절 서독와 베를린을 잇는 구간은 모두 3곳이었다. 베를린-함부르크, 베를린-하노버, 베를린-뉘른베르그 구간이었다. 동독은 이 구간을 개방해 통행료를 받아 챙겼고 돈과 안보를 교환하는 과오를 범했다. 이 구간에는 인터숍이라는 편의점과 식당 등 휴게소가 있었다. 많은 서독인들이 이곳에 들러 편의용품이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아무런 제약없이 자연스럽게 동서독 주민이 만나는 곳이었다. 물론 슈타지 요원의 감시가 늘 따랐지만 인적 교류가 다양하게 일어났던 현장이다.

동독 상품의 질이 낙후해 서독 주민이 즐겨 찾지는 않았지만 상인들은 상품 가격을 서독 마르크화로 받았다. 당시 마르크의 가치는 서독이 동독의 4배 이상이었다. 동독을 찾는 서독인은 의무적으로 20마르크를 1:1로 교환해야 했다.


또한 서독-베를린 구간은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파워가 부딪히는 공간이었다. 포르쉐, 메르세데스, BMW, 폭스바겐, 아우디 등과 트라반트, 바르트부르그 등 동독 자동차가 만났다. 시속 80km를 힘겹게 달리는 트라반트 옆으로 서독 고급차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 구간에 제한 속도 80km 표지판이 등장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동독 주민의 마음 속에는 서독의 막강한 경제력에 대한 동경심이 더욱 커졌다. 클라이슬러, 혼다, 도요타 등 세계적인 자동차들과 많지는 않았지만 소련의 라다, 체코의 스코다 등 동구권 자동차들도 눈에 띄었다.

청소년들의 교류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방송 교류도 활발해 채널을 돌려 동서독 방송을 접할 수 있었다. 이렇듯 동서독 간 청소년, 문화, 방송 등 비정치적 교류가 지속적으로 늘어났지만 어떤 작은 통합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작은 통일에서 큰 통일이라는 구호도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교류와 협력이 늘어날수록 양독 간 괴리는 더욱 커졌다. 동독 주민은 서독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로움을 동경했고 서독 주민은 동독 사회의 부조리를 눈으로 확인했다.


서독과 동독이 경제, 문화, 스포츠, 방송 등 비정치적 교류 협력을 통해 정치적 협력을 확대한다는 기능주의적 접근은 결국 허사였다. 비정치적 교류가 늘어도 동독의 정치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동독인이 변화를 선택해야 했고 시민들의 무혈혁명을 통해 동독 공산정권이 막을 내렸다. 작은 통합에서 큰 통합으로 나아가 통일을 이룬다는 구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말해주는 사례다.

북한은 이런 동독의 몰락 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기능주의적 접근을 통해 체제가 와해 되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남북 경협으로 챙긴 8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은 인민경제 향상과는 무관한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사용해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고난의 행군 때에도 호화 사치품을 수입해 왔고 장·단거리 미사일은 물론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잠수함 탄도미사일(SLBM) 개발도 지속하고 있다. 자위용이라고 하지만 3대 세습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차단하지 못하는 남북 교류협력은 무의미하다, 상호주의를 지키고 경협에 앞서 민간차원의 인적 교류와 협력을 우선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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