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대동독정책(XIV): 동서독 화폐통합
마르크화가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마르크화를 찾아 가겠다.
XIV.
1990년 3월 18일 자유선거로 로타 드메지어(Lothar de Maizière) 정권이 출범하자 본격적인 통일협상이 추진되었다. 5월 18일 체결된 화폐•경제•사회통합은 첫 걸음이었다. 특히 화폐통합은 가장 충격적인 정책으로 전문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화폐통합의 제1의 목표는 동독에 서독의 마르크화를 도입해 동독경제 재건의 기초를 닦는 것이었다. 다음은 세부지침이다.
▴ 동독시민은 1인당 6천 마르크까지 1:1의 환율을 적용, 6천 마르크 초과분에 대해서는 2:1의 환율을 적용한다. ▴ 법인재산 및 기타재산의 환율은 2:1이다. ▴ 동독 이외의 지역에 주둔하던 자연인이나 법인의 재산은 1989년 12월 31일 限, 2:1의 환율을 적용한다. ▴ 기타 해외재산은 3:1의 환율을 적용한다. ▴ 동독 외환관리법을 위반한 재산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세부지침이 정해지자 환율 혜택을 위한 기발한 묘수들이 동원되었다. 물론 불법행위도 적지 않았다. 성인 1인당 6천 마르크(동독)까지 1:1 환율을 적용받기 위해 가족, 친지들 사이에 재산을 나누어 교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업은 해외재산을 비밀리에 동독으로 이체해 유리한 환율을 적용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불법행위보다 더 본질적인 갈등이 불거졌다. 실질가치가 서독의 1/4에 불과했던 동독 마르크화를 1:1로 교환하니 경제적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논리였다. 가격 경쟁력을 잃은 동독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대량실업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비판하는 학자도 많았다. 내용인 즉 동독 기업은 가격경쟁력이 아니라 화폐통합과 무관하게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이 사라졌다는 반론이었다. 어쨌든 화폐통합으로 인해 일시에 많은 기업이 파산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맞을 매, 먼저 맞은 것’이라는 반론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콜 총리는 어떤 근거로 이와 같은 충격적인 정책을 서둘러 추진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서독 행 대량이주를 막을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었다. 이미 1989년 하반기에만 50만 명의 동독인을 수용해야 했던 서독 사회가 동독인의 대량이주를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독인들은 “"Kommt die D-Mark, bleiben wir, kommt sie nicht, geh'n wir zu ihr!"(서독 마르크가 오면 머물고, 오지 않으면 마르크를 찾아갈 것이다)라며 무작정 서독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서독의 경제적 풍요로움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콜 정부는 이런 대량이주를 막기 위한 정책으로 화폐통합을 택했다. 콜은 동독인을 향해 ”여러분은 이주하지 않아도 경제적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며 동독인에게 구매력 1위 마르크화를 선사했다.
둘째, 콜 총리는 통일의 기적을 선물한 동독인에게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홀로코스트, 전쟁범죄국로 얼룩진 비극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바꾸고 기적과 같은 통일의 문을 열어준 동독주민들에게 화폐통합은 최소한의 보답이었다.
화폐통합이야말로 포퓰리즘을 넘어 동독 재건과 동서독 통합을 위한 ‘신의 한 수’였음을 알 수 있다.
I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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