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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대동독정책(XIII): 프라이카우프, 헝가리 국경개방

박상봉 박사 2017. 2. 21. 11:04

서독의 대동독정책(XIII): 프라이카우프, 헝가리 국경개방

 

 

-철의 장막에 생겨난 틈새-

 

XIII.

서독 대동독 정책의 기본 중 하나가 이주자들의 수용이었다. 소련과 동유럽에 거주하던 독일 혈통까지 받아 들였다. 이 규모가 850만여 명에 달했다. 독일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규모다. 게다가 통일 후유증이 완전히 극복되지 않은 통일 25년 차인 2015년에도 시리아 등 난민 110만 명까지도 수용했다. 탈북자 3만 명을 수용하고 엄살을 부려대는 우리 사회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동독인 이주자의 유형도 다양했다. 우선 탈출자로 비자 없이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이다. 동독인의 탈출은 1949년 분단 직후부터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까지를 1단계, 1961년부터 1989년 여름까지를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탈출 1단계인 1949~1961년 동안 탈출자 규모는 연평균 20만 명에 달했다. 6.17 반소 저항이 있었던 1953년 한 해에는 33만 명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탈출이 이어지자 동독 당국은 1961813일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1단계 총 탈출자 수는 268만여 명에 이른다.

2단계인 1961~1989년에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규모가 10%인 연평균 1~2만 명으로 급감했다. 그럼에도 이 기간 탈출자는 대략 47만 명에 달했다. 또한 198911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연말까지 35만 명이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이주했다.

귀순자는 당국의 허가를 받고 서독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노약자, 연금수령자, 반정부인사 및 정치범들이다. 동독은 사회적 약자들을 방출했다. 서독 비자를 주고 이주를 유도했으며 반정부 인사들은 재산을 당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동독을 떠날 수 있었다. 서독은 정치범들까지 서독으로 데려왔다. 1인당 평균 9만 마르크를 들여 분단 중 총 34천여 명을 데려왔다. 소위 프라이카우프(Freikauf)였다.

하지만 1989년 여름 시작된 탈출은 그 의미가 달랐다. 이념적, 저항적 성격이 짙었다. 813, 동독인 131명이 서독대표부에 진입해 서독이주를 요구했다. 바르샤바,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에도 동독인이 몰려들었다. 대사관 뜰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텐트로 가득했다.

겐셔 외무장관이 10월 초 프라하 서독대사관 발코니에 올랐다. “여러분,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여러분을 서독으로 모셔가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순간 함성이 터졌다. 다음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지난 331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겐셔는 18년 외무장관 재임 중 이 연설이 최고의 연설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있던 76백여 명의 동독인들이 특별열차 편으로 서독 바이에른에 도착했다.

911일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 호네커에게 KO 펀치를 날렸다. 819일 사건 후 콜의 통일외교가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819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헝가리 정부가 범유럽 유니온이 주최하는 평화축제를 위해 3시간 국경을 개방했다. 많은 동유럽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고 동독 청년 600여 명도 참석했다.

행사 후 동독 청년 600명이 오스트리아로 탈출, 서독 행을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콜 총리는 특사를 파견해 청년들을 데려오는 한편, 헝가리 정부와 국경에 대한 담판을 벌였다. 동독 정권도 적극 나섰다. 사회주의 동맹국, 형제국인 헝가리가 동독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며 맞섰다. 헝가리를 둘러싼 동서독 정부의 외교전쟁이었다. 이 외교전에서 서독이 승리, 헝가리 정부가 상시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토록 했다. 이 루트를 통해 10월 말까지 24천여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이주했고 그 후 한달 여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이 결정의 주역 기율라 호른(Horn) 헝가리 외무상은 회고록 ‘Freiheit, die ich meine'(내가 생각하는 자유)에서 이 결정이 정치인생에 최고의 어려운 결단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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