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다시보기

서독의 대동독정책(XII): 독소 정상회담

박상봉 박사 2017. 2. 20. 09:26

서독의 대동독정책(XII): 독소 정상회담

 

우리나라에 알려진 독일통일은 왜곡으로 얼룩져있다. 독일통일에 대한 장맛은 모른채 구더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첫째, 많은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이념적으로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함으로 완성된 통일을 수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독일어 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 재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가 확대되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통일정책으로 이어지는 통일의 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코카서스의 기적 - Deutschlandfunk

 

XII.

고르바초프는 전임 서기장과는 달랐다. 주도적으로 소련 정치, 경제 전반에 개혁 개방을 선도했다. 콜 정부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자문하고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겐셔(Genscher) 외무장관은 수시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쉐바르드나제(Schewardnase) 외무상과 국정을 논의하고 독일 및 유럽의 미래에 대한 협력을 주문했다.

이런 노력이 1990716일 독소 정상회담을 통해 결실을 맺었다. 코카서스 정상회담이 확정된 것이었다. 콜 총리는 겐셔 외무장관, 바이겔 재무장관 등을 대동해 회담에 임했다.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물론, 소련군 철수 및 독일 연방군에 관한 8개항에 대해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주요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독일 문제는 독일 민족의 자율적인 결정에 맡기며 통일의 대상은 동독, 서독 및 베를린을 포함한다. 통일과 함께 4개 연합국의 지위는 소멸, 독일은 완전 주권을 회복한다. 통일독일은 나토에 잔류한다.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시한을 4년 내로 명시하고 서독은 소련군 철수 비용을 부담하는 등 서독정부의 대() 소련 재정지원을 약속한다. 통일 후 연방군 병력은 37만 명으로 제한한다. 연방군은 대량살상무기인 ABC 무기 즉 핵, 화학, 생물무기의 제조, 보유 및 처리를 하지 않으며 핵비확산조약(NPT)의 회원국으로 남는다. 소련군이 동독에 잔류하는 한 미,,프 연합군은 통일 후라도 서베를린에 주둔한다. 오더-나이스 국경을 인정한다.

코카서스 회담은 19909122+4 회담으로 이어졌고 이 자리에서 2차 대전 모든 당사국들은 독일의 통일을 승인하게 되었다. 동독과 서독,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외무장관이 참석, 독소 코카서스 회담의 합의사항을 재확인하고 추가로 통일헌법에 연방군의 군사행동 금지조항과 철수 소련군을 위한 주택 및 직업교육도 지원하라는 조항을 넣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고르바초프가 통일의 일등공신이라고 믿는다. ‘고르비'(Gorbi)라는 애칭도 만들어주었다. 독일인들은 고르비의 아내 라이샤 여사가 암투병할 때는 서독으로 초청해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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