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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대동독정책(X):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박상봉 박사 2017. 2. 16. 09:03

서독의 대동독정책(X):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우리나라에 알려진 독일통일은 왜곡으로 얼룩져있다. 독일통일에 대한 장맛은 모른채 구더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첫째, 많은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이념적으로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함으로 완성된 통일을 수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독일어 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 재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가 확대되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통일정책으로 이어지는 통일의 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독 최초 자유선거 결과(1990.3.18)

CDU(기민련), DA(민주봉기), SPD(사민당), PDS(민사당, 사통당 후신), DSU(독사련) 등

 

X.

원탁회의는 1989127일 정식 발족되었다. 정치적 격변기, 동독 무혈혁명을 주도했던 시민단체와 교회 대표들이 주 멤버였다. 원탁회의는 당시 정치적 상황을 이끌었고 정부도 한 멤버로 원탁회의에 참여했다. 호네커 퇴진 후 크렌츠 정권에서 총리에 선임된 한스 모드로프(Hans Modrow)1990128일을 기해 원탁회의에 참여키로 했다. 이후 국정은 원탁회의와 모드로브 정부의 이원체제 하에서 이루어졌다.

원탁회의는 사통당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했다. 당의 창과 방패로 공산권력의 시녀였던 슈타지를 해체하고 헌법을 개정, 조속히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903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가 치러졌다.

선거에는 동독 기민련, 사민당, 위성정당, 민사당 및 시민단체들도 대거 참여해 총 1,220만 명 동독 유권자의 심판을 받았다. 새 선거제도에 익숙지 않은 시민단체들은 뜻에 맞는 당을 모아 연합체를 구성했다. 대표적인 연합체가 독일연합이었다. 독일연합에는 동독 기민련, 독사련, 민주봉기 등이 속했다. 또한 원탁회의를 주도했던 뉴포럼’, ‘민주주의 지금이니셔티브 평화와 인권과 함께 동맹 90’을 결성했다.

동독 위성정당 LDPD, 독일포럼정당 DFP자유민주연대를 만들어 출마했다. 선거결과 독일연합이 득표율 48%, 사민당이 21.9%, 민사당이 16.4%, 자유민주연대 5.3%, ‘동맹 90’2.9%를 기록했다. 1위 독일연합의 선거 포스터에는 통일반대론자에게 기회는 없다는 구호와 함께 사회주의여 안녕’(Nie wieder Sozialismus)이 새겨져 있었다. 압승한 독일연합은 사민당과 자유민주연대 등과 대연정을 구성, 기민련의 로타 드메지어를 총리로 선출해 민주정권을 출범시켰다. 부총리 겸 대변인에는 앙겔라 메르켈이 선출되었다.

드메지어 정권은 통일을 전제로 현안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서독과의 화폐·경제·사회통합을 체결하고 슈타지 해체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구태 청산에 나섰다. 새 시대를 연 드메지어 총리는 1990102일 통일 전야제에서 이별은 슬픔을 의미하지만 동독과의 이별은 기쁨이요 희망이라는 연설로 감동을 주었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상임지휘자이자 월요데모의 주역이었던 쿠르트 마주어(Masur)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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