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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대동독정책(IX): 월요데모와 원탁회의

박상봉 박사 2017. 2. 15. 11:00

서독의 대동독정책(IX):

월요데모와 원탁회의(Runder Tisch)

 

IX.

콜은 통일을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분단국의 최고 가치는 분단극복, 통일이었다. 1989년 동독 급변시기, 콜의 정책은 대동독 정책과 통일외교로 양분된다. 대동독 정책의 핵심은 동독 내 민주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공산당과의 통일협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파악했던 콜은 동독의 급변사태를 민주정권의 창출 기회로 삼았다.

1989년 가을, 호네커 정권은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했다. 대외적으로는 고르바초프가 주도한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의 흐름이 동유럽을 경유해 동독으로 밀려들었다. 대내적으로는 198957일 지방선거에 슈타지가 개입, 선거를 조작한 사실이 발각되어 주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 저항은 월요데모로 이어지며 호네커를 압박했다. 또한 주민들의 탈출이 조직화되며 동베를린 서독대표부, 바르샤바 및 프라하 서독 대사관으로 탈출자들이 몰려들었다. 콜 정부는 이들을 전원 서독으로 불러들였다.

마침 전통야당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불붙은 월요데모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겉잡을 수 없었다. 초기에 1천여 명에 불과했던 참가자도 월요데모 6번 만인 1989116일에는 40만 명으로 급증했다. 호네커의 무력진압 명령은 공허했지만 오기는 끝나지 않았다. 10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건국 행사에는 고르바초프가 참석해 축하하기로 했다. 고르바초프는 40주년 축하연설에서 호네커의 기대와는 달리 “Wer zu spä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삶은 시기를 놓친 자를 벌할 것이다라며 호네커의 기대를 저버렸다. 하지만 그는 연설에서 과거 40년 동안 동독이 이룩한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고 동독인의 탈출과 반공 시위는 서독 정부의 흑색선전 때문이라며 버텼다. 동독 공산당도 이해할 수 없는 연설이었고 결국 당이 나서서 호네커를 출당시키고 서기장과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박탈했다. 사통당 정치국은 1989118일 자로 폐쇄되었다.

호네커가 축출되자, 시민운동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시민단체의 정당 결성이 가속화되었다. ‘뉴포럼’(Neues Forum),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 ‘민주봉기’(Demokratischer Aufbruch) 등이 생겨나 정치 전면에 나섰다.

뉴포럼은 항아리를 넘치게 한 최후의 한 방울이 의미하듯 공산당에 최후의 일격을 가해 무릎을 꿇린 시민단체였다. 다른 시민운동과 달리 뉴포럼은 교회 밖에서 시작된 최초의 전국 규모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결성 초기부터 당과 슈타지의 감시 대상에 올라 모든 일정이 보고되었다. 반체제 인사였던 베어벨 볼라이, 옌즈 라이히 등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인사들도 동참했다.

민주주의 지금1989912일 민주주의 개혁과 주민의 정치참여를 모토로 내걸고 설립되었다. 민주주의 지금이 제시한 사통당, 교회, 시민운동, 위성정당 등의 ‘4자 회의아이디어는 원탁회의로 발전했다. 또한 사통당의 주도적 역할을 규정하는 헌법 1조 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2달 만에 75천명의 서명을 모았다.

민주봉기198910월 시민단체로 출발, 12월 전당대회를 열고 정당의 조직을 갖췄다. 정당 프로그램에는 사회주의 노선의 포기, 시장경제 추구, 통일이 목표로 포함되었다. 대변인으로는 앙겔라 메르켈이 선임되었다.

1989년 여름 동독 무혈혁명을 이끌었던 시민단체 지도자들 중에는 통일 후 요직을 거치며 정치인으로 거듭난 인물들이 적지 않다. 가우크(Gauck) 대통령, 메르켈 총리, 티에르제(Thierse) 하원의장, 슈톨페(Stolpe) 교통부장관 및 브란덴부르크 주총리, 비어틀레(Bierthle) 슈타지 문서관리청장 등이다.

동독의 시민운동이 독일통일과정에서 이루어낸 두 개의 의미있는 결과는 베를린 장벽 해체와 시민단체 연합체인 원탁회의(Runder Tisch)’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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