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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대동독정책 및 시사점(VI): 에곤 바 vs 슈미트

박상봉 박사 2017. 2. 10. 18:05

서독의 대동독정책 및 시사점(VI): 에곤 바 vs 슈미트

 

우리나라에 알려진 독일통일은 왜곡으로 얼룩져있다. 독일통일에 대한 장맛은 모른채 구더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첫째, 많은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이념적으로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함으로 완성된 통일을 수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독일어 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 재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가 확대되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통일정책으로 이어지는 통일의 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에곤 바(Egon Bahr)

VI.

브란트 동방정책의 설계자는 에곤 바(Egon Bahr). 그는 1963715일 바이에른 주 투칭 소재 크리스천 정치아카데미에서 아데나워 시대의 할슈타인 원칙을 뒤집는 동방정책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핵심은 ‘Wandel durch Annährung'(접근을 통한 변화)로 불모지였던 소련과 동유럽으로 외교적 행보를 넓혀 간다는 주장이었다.

에곤 바의 설계에 따라 브란트는 소련, 폴란드, 체코 등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동독과의 불가침 협정과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동독과의 합의서는 에곤 바가 직접 실무를 총괄했다. 합의서에는 부속서류로 독일통일 서한을 끼워 넣었다. 나중에 이 서한은 헌재의 기각 판결의 중요한 문건이 되었다. 즉 합의서가 통일을 양보하고 동독을 국가로 승인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에곤 바의 설계에 결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보불감증이었다. 브란트 재임 22년 만에 총리실 스파이 귄터 기욤(Guillaume) 사건이 터졌다. 1956년 위장 탈출, 서독에 잠입한 기욤은 1년 후 지령을 받고 사민당에 입당했다. 1968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시의원에 선출되었고 교통부장관 레버의 추천으로 총리실에 발탁되었다. 잘 훈련된 기욤은 능력을 인정받으며 1972년 브란트의 보좌관에 올라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총리 휴가 중에는 브란트의 개인 팩스까지 직접 챙겼다.

서독의 기밀자료 뿐 아니라 총리 개인의 신상까지 동독에 건네졌다. 이런 18년 스파이 행각이 1973년 감시망에 걸렸다. 헌법수호청은 이후 1년 이상 기욤의 행각을 추적해 1974424일 전격 체포했다. 브란트는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퇴했다. 기욤은 13, 아내는 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동독 공산당은 애국자 기욤을 동독으로 불러들였다. 복역 중인 1981, 동서독 간 스파이 교환으로 석방시킨 것이다. 동독에 도착한 기욤은 평화의 사절칭호를 받으며 영웅 대접을 받았다. 1986년에는 전처와 이혼, 슈타지 동료였던 15세 연하의 간호사 엘케 브뢸(Bröhl)과 재혼하며 행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1989년 장벽이 붕괴되고 동독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기욤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통일 5년 차인 1995, 기욤은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는 귄터 기욤이 아닌 귄터 브뢸로 적혀 있었다. 이름을 바꿔서라도 기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브란트의 후임에는 같은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가 선출되었다. 1974년 선거에서 기민당이 1위를 차지했지만 2위 사민당이 기민당에 앞서 3당 자민당과 연정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슈미트는 전임 총리의 동방정책을 이어가면서도 안보를 중시했다. 슈미트의 안보관은 재임 중인 1978년 면모가 드러났다. 소련이 동독에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배치하자 분노하며 미국의 핵미사일 퍼싱 II를 들여오는 강공책을 택했다. 퍼싱 II는 불과 10분 내에 모스크바에 날아가 초토화시킬 정도의 위력을 보유했다.

사민당원 뿐 아니라 평화운동가들 30만 명이 모여 반대 시위를 벌였다. 에곤 바도 분노했다. 당시 사민당 사무총장이었던 에곤 바는 총리가 동독을 협박하는 전쟁상황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에곤 바의 분노는 통일 후에도 여전했다. 1999517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도 슈미트의 퍼싱 II 결정은 ‘Symbol der Perversion des Denkens’(왜곡된 사고의 상징)이었다고 비난했다. 그는 머리로는 통일을 주장했어도 가슴은 온통 사회주의로 물들어 있었다.

이런 애매한 에곤 바의 실체가 또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2014년 일간지 디벨트(Die Welt)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도한 것이었다. “Wo war Egon Bahr nach dem Fall der Berliner Mauer?"(에곤 바는 장벽 붕괴 때 어디에 있었나?)”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보도는 에곤 바의 1989년 인터뷰 내용을 다뤘다. 11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당시 베를린 시장 사민당의 발터 몸퍼(Momper)가 브란트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당일 기념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당시 인터뷰에서 에곤 바는 질문에 브란트와 함께 베를린행 비행 중이었다고 답변했지만 거짓이었다. 브란트와 동행했던 사람들은 바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장벽 붕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베를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브란트를 떠나 사민당 내 극좌파인 오스카 라퐁텐 편에 붙었다. 라퐁텐은 콜 정부의 23조 통일방안을 강력히 거부한 인물이다.

베를린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브란트는 콜의 통일을 강력히 지지했다. “J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ört"(함께 태어난 것이 이제 함께 자라게 되었다)라는 명언은 그 때의 감격을 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 브란트가 시작한 것을 콜이 거두었다고 말한다.

2016, 에곤 바의 추종자들이 한국 땅에 싹을 틔우고 있다.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다. 그는 저서 베를린 장벽의 서사에서 모든 자료와 지식을 총동원해 에곤 바를 찬양하고 있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200페이지 이상이 브란트와 바의 동방정책에 할애하며 맹신한다. 물론 책 어디에도 에곤 바의 이념 문제나 배신 행각을 찾을 수 없다. 또한 19대 국회 외통위 위원장을 지낸 나경원 의원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접근을 통한 변화의 신봉자로 소개하며 우리가 5.24조치를 뛰어넘어 북한과 경협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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