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다시보기

서독의 대동독정책 및 시사점(IV)

박상봉 박사 2017. 2. 8. 09:11

 서독의 대동독정책 및 시사점(IV)

 

우리나라에 알려진 독일통일은 왜곡으로 얼룩져있다. 독일통일에 대한 장맛은 모른채 구더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첫째, 많은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이념적으로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함으로 완성된 통일을 수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독일어 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 재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가 확대되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통일정책으로 이어지는 통일의 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IV.

헬무트 콜(Helmut Kohl)은 통일을 이끌며 독일 역사상 최장수 총리의 기록을 갱신했다. 재임기간이 통일 전 8, 통일 후 8, 16년이다. 초대 아데나워 총리의 재임기간 14년보다 2년이 많다.

그는 1989년 동독 급변사태를 무혈혁명으로 이끌고 동독인의 통일 에너지를 모아 1990103일 통일을 완성했다. 이어 122일 치러진 동서독 통합 선거에 기민련/기사련의 총리 후보로 출마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통일 초기 4, 콜의 재임 3기는 통일 후유증과 혼란으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서독인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통일비용에 피로감이 팽배했고 동독인은 장밋빛 기대가 현실과 충돌하며 갈등이 고조되었다. 서독은 매년 2천억 마르크의 재정을 동독에 투입해야 했다.

야당의 비판이 거셌다. 사유화 및 동독재건 과정에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지만 비판은 가혹했다. 콜은 이런 혼란과 부작용과 함께 재임 34년을 보냈다. 1995년 통일 후 2번째 하원선거, 콜을 대신해 총리 후보로 나설 인물이 없었다. 연속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과제를 감당할 인물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다.

콜 총리가 다시 나섰다. 거센 비판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콜은 입후보의 변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국민 여러분! 정부는 4년 동안 통일의 혼란과 부작용을 처리하고, 동독을 재건하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범했습니다. 나는 우리와 같은 통일의 역사적 전례가 단 한 차례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해해주시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시오”.

독일 국민들은 진솔한 콜의 고백을 받아들여 통일 제2기 정권도 위임했다. 비록 실수가 많았지만 콜의 공로를 인정해준 결과였다. 동독 재산에 대한 사유화, 화폐통합, 공산정권의 재산환수, 공산정권에 대한 처리 등 모든 정책들이 개척자의 길이었지만 방향과 목표는 맞았다.

이런 시행착오와 갈 지() 자 행보를 걸어온 독일통일의 과정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교훈이다. 그야 말로 역사적 전례이다. 야당과 일부 전문가들 중에 분단의 역사, 전통과 문화가 전혀 다른 독일의 통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독일통일이 이라는 독설도 들린다. 동의할 수 없다.

프랑스와 TGV, 독일의 ICE, 일본의 신간선이 있으니 KTX를 쉽게 놓을 수 있다. 지형이 다르고 기후와 사회적 환경이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는다.

다른 점을 찾으려면 이미 거론된 것이 어디 전부이겠는가. 끊임없이 더 많은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 독일통일과 다른 점이 많다 해도 통일한 가지는 분명히 동일하지 않은가. 후발주자로서 독일이 이루어낸 통일의 모습을 연구하는 길은 하늘이 준 기회이다. 독일통일을 현대사의 기적이라 한다. 이 유일무이한 기회를 간과한 채 성공적인 통일을 이루기 어렵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의 독일통일 무용론은 그들의 통일에는 헌법의 가치와 정신이 담겨져 않았기 때문이다. 라퐁텐의 주장처럼 남과 북이 합의 하에 통일헌법을 만들어 단계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좋은 말의 반복이다.

통일은 어차피 우리 몫이다. 적극적으로 성공한 통일을 연구해야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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