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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대동독정책 및 시사점(II): 동독 주민의 발 투표

박상봉 박사 2017. 2. 6. 10:49

서독의 대동독정책 및 시사점(II)

동독주민의 발 투표

 

우리나라에 알려진 독일통일은 왜곡으로 얼룩져있다. 독일통일에 대한 장맛은 모른채 구더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첫째, 많은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이념적으로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함으로 완성된 통일을 수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독일어 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 재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가 확대되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통일정책으로 이어지는 통일의 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90년 8월 23일 새벽 2:47 인민회의장 시계

 

II.

1990823일 새벽 247, 동독 인민회의는 동독은 1990103일을 기해 서독 기본법 23조에 따라 서독 연방체제에 편입한다고 선언했다. 그 해 318, 동독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로 탄생한 의회가 편입(Beitritt) 통일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 선언은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 서독 여야 정치권에서 불거졌던 통일논쟁을 잠재우기도 했다. 서독 기본법(헌법)에는 통일 관련 두 개의 조항이 있었다. 23조와 146조였다. 23조는 동독이 서독 기본법에 편입함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조항이며 146조는 동서독이 합의해 통일헌법을 제정, 법적인 틀을 만들어 통일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1989년 가을, 여야 정치권은 이 두 방안을 놓고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콜 정부와 여당은 23조를 내세웠던 반면, 야당은 당시 자아란드 주 총리였던 오스카 라퐁텐을 중심으로 146조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23조가 통일에 역점을 두었다면 146조는 동독과의 합의에 초점을 두었다.

콜에게 통일은 어떤 이유로도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반면 라퐁텐은 경제적 부담을 내세워 동독과 합의를 거치는 단계적인 통일을 주장했다. 이 갈등이 동독 인민회의의 결의로 일단락된 것이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두 나라가 합의해 통일을 이룬다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였지만 허구로 판가름 난 순간이었다.

동독인들이 공산체제에 저항해 민주정권을 창출했고 동독을 탈출해 서독행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헌법학자들은 이런 동독인의 행동을 발 투표’(Abstimmung mit Füßen)라고 평가했다. 1949년 분단으로 서독 기본법 제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동독인들이 탈출로 베를린 장벽을 해체한 사건에 사후투표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즉 동독인들은 발 투표로 기본법을 사후에 승인했다는 유권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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