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다시보기

서독의 대동독정책 및 시사점(VIII): 콜의 통일외교

박상봉 박사 2017. 2. 14. 09:32

서독의 대동독정책(VIII): 콜의 통일외교

 

우리나라에 알려진 독일통일은 왜곡으로 얼룩져있다. 독일통일에 대한 장맛은 모른채 구더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첫째, 많은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이념적으로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함으로 완성된 통일을 수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독일어 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 재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가 확대되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통일정책으로 이어지는 통일의 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VIII.

한 나라의 운명은 지도자의 결단에 따라 바뀐다. 링컨, 비스마르크, 처칠, 레닌, 호치민, 히틀러, 김일성, 이승만, 콜 등은 역사의 운명을 바꾼 지도자들이었다. 콜은 모든 편견과 선입견에 맞서 강력한 통일외교를 펼쳐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통일을 거머쥔 인물이다. 그는 부시, 고르바초프, 대처, 미테랑 등 당대의 거물들을 설득하며 기적과 같은 통일을 이루어냈다. 아마 그는 청년시절 정치에 입문해 대선배 정치인 비스마르크의 철학을 가슴에 새기며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비스마르크 재상, 1871년 독일제국을 통일했던 대정치인이다. 그의 정치철학인 “Politik ist, daß́ man Gottes Schritt durch die Weltgeschichte hört, dann zuspringen und versucht, einen Zapfel sines Mantels zu fassen"(정치는 역사 속 신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따라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것)은 모든 독일 정치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0센티미터의 거구로 평범한 정치인이었던 헬무트 콜은 1989년 여름 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신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동독인의 “Wir sind das Volk!"(우리가 주권을 가진 국민이다)에 이어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절규를 들었다. 그리고 통일을 향한 걸음을 하나 둘 내딛었다.

콜의 발걸음은 19891218일 드레스덴, 1990210일 모스크바, 1990225일 켐프 데이비드, 1990716일 코카서스로 이어졌다.

드레스덴 방문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40일 만이었다. 독일의 미래를 가르는 순간이었다. 콜은 이 방문에서 두 개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하나는 영국, 프랑스 등 주변국들의 우려를 잠재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일을 염원하는 동독인들의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헬무트!’를 연호하던 드레스덴 시민들로 넘쳤다.

연설을 앞 둔 전날 밤 콜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주변국의 지도자들과 언론들이 연설의 자귀 하나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 뻔했다. 혹시 말 한마디라도 실수한다면 뭇매를 가해 독일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콜의 연설은 동독주민 여러분, 자유를 위해 투쟁하십시오,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굳이 통일을 주장해 주변국의 반발을 초래해서도 안 되었고, 맥빠진 연설로 동독주민들의 열정을 꺾을 일도 아니었다.

모스크바 방문, 콜에게 가장 중요한 행보였다. 소련이 동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이미 겐셔 등 정부 주요 인사들이 모스크바를 드나들며 개혁개방을 자문하고 지지해 왔던 터에 콜은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는 등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개혁의 주체로 콜의 성의에 감동한 고르바초프의 마음이 움직였다. , 향후 독일문제는 독일인의 자율적 결정에 따른다는 견해를 피력하며 간접적으로 통일을 지지해 주었다.

콜의 다음 행보는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를 만났다. 부시는 동맹답게 독일통일을 지지해 주었고 통일 후 나토 가입을 약속해 주었다. 통일의 여정에 놓였던 3개의 벽을 넘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카서스를 찾아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개최, 8개항의 합의를 문서로 확정했다. 콜의 통일외교가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다.

당시 유럽 어느 나라도 독일통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격렬히 거부했던 영국의 대처 총리는 고르바초프를 향해 미친 것 아니냐며 모스크바로 날아가 담판을 짓기도 했다. 고르바초프의 입장을 확인한 후에도 오더-나이스 국경을 인정하라, 독일이 통일하더라도 나토에 잔류해야 한다는 등 조건을 내세우며 훼방을 놓았다. 미테랑의 조건도 까다로웠다. 프랑스는 독일의 라이벌로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차라리 민사당이 승리하기를 바랐었다는 고백을 했을 정도로 독일통일에 거부감을 보였다.

하지만 콜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지지가 확고하자 주변국의 반대도 서서히 누그러졌다. 유럽 통합 일정을 걱정하며 유로화를 추진했던 미테랑에 대해서는 독일 마르크화를 포기하는 과감함으로 보답해주었다. 이렇게 콜은 신의 발자국을 쫓아 그의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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