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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필하모니 평양 연주

박상봉 박사 2008. 2. 28. 12:32

 뉴욕 필하모니 평양 연주 해설

 

                           

 

지난 2월 26일 뉴욕 필하모니의 연주가 평양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이 사건에 대대적인 관심을 보이며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로이터 통신은 “북한의 외교적 쿠데타”라고 보도했고 중국의 언론들은 ‘얼음을 깨는 여행’이라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런 세계 언론과는 달리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뉴욕 필의 평양공연은 좋은 일이지만 북한정권은 여전히 북한정권”이라고 섣부른 판단을 경계했고 백악관의 반응도 “뉴욕 필의 공연과 북한의 변화는 별개의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바라보며 뉴욕 필의 평양공연의 의미를 새겨본다.


첫째, 김정일과 북한주민과의 괴리


뉴욕 필하모니의 평양공연은 북한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뉴욕필은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에 이어 드보르자크의‘신세계교향곡’과 조지 거슈윈의 ‘파리의 아메리카인’을 연주했다. 연주된 작품들 모두 미국적 색체가 강하게 들어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니 김정일이 공연을 허락하기 바로 직전까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 제국주의는 철천지 원쑤라고 교육받아온 북한주민으로서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청소년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는 미국인은 승냥이로 그려져 있다. 한반도에 복음을 전한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인들을 괴롭히고 심지어 생체실험을 한 악마로 알려져 있다. 반미주의는 북한의 건국은 물론이고 김정일의 체제와 권력의 기초였다. 이런 기초를 김정일 스스로 허물고 있다.


김정일이 더 이상 북한 주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권을 유지하는 데 대다수의 북한주민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이자 200만의 정예요원만 있다는 된다는 이야기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는 과정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던 김정일이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은 ‘인민들은 권력의 편이 아니라는 교훈’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일성 사후 인민들의 삶이 더 황폐해지고 인권침해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탈북을 방치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의 케이 석 연구원은 90년대 중반 대기근으로 2, 3백만명이 사망한 이후 주민들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가 불가능해졌다는 주장도 김정일과 주민들과의 괴리를 시사하고 있다.


둘째, 미국에 의존된 북한


북한의 핵 실험은 선군정치만이 권력을 유지해 줄 것으로 믿는 김정일의 도박이었다. 이 도박은 국제사회의 저항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우방으로 믿었던 중국의 반발도 불러왔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다면 대만이나 일본의 핵무장을 막을 수 없으며 동북아 지역의 군사강국의 지위가 위치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중국의 판단이다.


미국으로서도 북한 핵보유를 인정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핵확산금지 체제 NPT를 와해시키는 것으로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 6자 회담은 이런 강대국들의 이해의 산물이며 결국 북핵 문제는 6자회담의 틀 속에서 해결될 것이다.


북한의 뉴욕 필 공연은 초강대국 미국을 향한 유화 제스추어다. 북한의 전 지역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미국을 같은 편으로 만들면 만사형통이며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안방을 내주더라도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김정일의 생각이다. 김정일에게 핵은 신과 같은 존재다. 미국은 이런 김정일의 의도를 꿰뚫고 있어 보인다. 초조한 것은 김정일이다. 뉴욕 필에 이은 에릭 클립턴에 대한 초청은 이런 초조함의 이면인 셈이다. 김정일은 권력을 위해서는 국가의 자존심도, 체제의 뿌리도 아랑 곳 하지 않는다. 성조기는 걸려도 태극기는 안되며 미국 국가는 불려도 우리나라의 애국가는 안된다.


샹들리에, 대리석으로 치장된 만수대 만찬장의 호화로움과 끼니도 거르는 잿빛 어두움의 공존은 이런 김정일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대변해 준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독재자의 한계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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