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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교회 평화기도회

박상봉 박사 2008. 2. 3. 19:15

 니콜라이교회 평화기도회

 

                            

 라이프치히(Leipzig) 니콜라이 교회의 모습

 

통일 전 라이프치히는 공산독재 하이긴 하지만 전통적 야당 도시였다. 동독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가 이 도시에서 시작됐고 오래 전부터 월요데모의 싹을 심어온 평화기도(Friedensgebete)의 본산지 니콜라이 교회(Nikolai Kirche)가 이 도시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분단 시절 동독 교회는 비교적 정권의 통제를 덜 받던 곳이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서가 아니라 동독 교회의 본질을 지켜내려는 서독 교회의 전폭적인 지원과 대외적으로 동독 내에도 자유로운 종교활동이 보장되어 있다는 선전에 발목이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통일 전 동독 내 교회는 정치적으로 탄압받던 재야인사들과 정치범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동독 교회를 통해 재야인사들이 재산을 공산당에 바치거나 거액의 돈을 정권에 지불하고 서독으로 이주해왔다. 이 일을 가장 헌신적으로 추진했던 사람이 바로 통일 직후 브란덴부르크의 주 총리로 일했던 슈톨페(Manfred Stolpe) 장로였다.


니콜라이 교회는 1981년부터 공산권력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이 모여 평화기도회를 지속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반체제 기도회이기 때문에 소수가 모였고 비밀경찰 슈타지(Stasi)에 의해 주시의 대상이었고 엄격히 통제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유럽 사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회를 연다는 명분으로 평화의 기도를 지속해왔다. 이 평화기도회가 1989년 9월 4일 새로운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 소련에서 시작되고 체코, 폴란드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반독재 투쟁의 물결이 니콜라이 교회 평화의 기도회에 강하게 밀어닥친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망명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89년 8월 8일 동베를린 소재 서독대표부에는 131명의 동독 주민들이 진입해 서독 행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8월 19일에는 헝가리 민주단체 범유럽 유니온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개최한 평화축제장에 참가했던 600여명의 동독 청년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는 일이 있었다. 헝가리는 이 행사를 위해 3시간 국경을 개방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서독 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고 헝가리 정부는 서독의 요구에 따라 9월 11일 전격적으로 그동안 봉쇄되어있던 대(對)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키로 결정했다. 이로부터 10월말까지 무려 2만4천여명의 동독인이 이 루트로 서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체코나 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에도 연일 수백명의 동독인이 진입해 공산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서독으로의 이주를 요구하게 되었다. 동독의 강력한 대응책이 마련되어 헝가리로 통하는 체코와 폴란드로의 여행자체를 불허하고 헝가리에게는 전통적 우방국으로서의 외교관계를 단절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자극받게된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기도회는 슈타지에 의한 정치, 공산당인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독재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9월 4일 당일의 평화기도회는 종전의 기도회는 종전의 모임과는 달랐다. 기도회가 끝났지만 사람들이 떠나지 않았고 교회 앞 광장으로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슈타지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약 1천명이 운집했고 “슈타지 나가라”, “대량탈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여행자유화조치를 취하라”와 같은 구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시작으로 매주 월요일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니콜라이 교회를 찾았다. 슈타지 요원들의 감시와 통제도 강화되었고 모임을 강제로 해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동독 주민들의 저항은 점점 거세져갔다. 월요일 집회는 월요데모 즉 Montagsdemonstration 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운동의 방향도 반(反) 공산저항운동으로 변해갔다. 동독 공산당은 이 운동 속에서 시민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저항감을 발견하게 되었다. 9월 11일과 18일자 월요데모는 슈타지에 의한 체포와 강제진압으로 더 이상 이 운동이 지속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9월 25일 월요데모에는 평화기도회가 끝난 후 무려 8천명이 데모대에 합류하는 기록을 세웠다. 저항운동이 거세져 갔고 10월 2일자 월요데모에는 무려 2만명이 참가함으로 또 다시 슈타지의 탄압과 이에 저항하는 시위대와의 사이에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베를린의 반독재 저항운동의 상징이었던 겟세마네 교회에 동독의 정치범을 위한 경고시위가 시작됐다. 10월 9일 월요데모에서는 자발적으로 폭력자제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 속에서 자유, 자유선거, 비폭력, 정치범 석방과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10월 16일자 월요데모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2만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참가했다. 슈타지 간부들에 의해 시위대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결정되었으나 점점 거세지는 시위대의 행렬 속에서 슈타지의 탄압계획은 포기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 공산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호네커(Erich Honecker)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월요데모 일곱번째 만의 민의의 승리였다. 권좌에서 물러난 호네커 총서기는 그의 재임기간 중 그토록 탄압했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해 동베를린 소재 소련 야전병원으로 도피, 소련 망명길에 올랐다. 당시 북한은 호네커에게 망명지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렇듯 동독의 월요데모는 국민의 뜻과 이완된 권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다. 북한의 변화가 권력의 유지가 아니라 진정 북한인민들의 뜻을 반영하고 우리의 대북정책 또한 투명하고 정의롭게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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