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토크

해설61: 레나테 홍(Renate Hong)의 비극

박상봉 박사 2007. 9. 3. 14:24
 

해설61: 레나테 홍(Renate Hong)의 비극

 

                  

                                레나테 홍 할머니와 아들 페터, 사진출처:FAZ

 

북한 발 이산가족의 비극은 비록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같은 분단국가로 분단의 고통을 함께 겪었던 독일 땅에도 북한 발 이산가족의 비극은 피해가지 않았다. 레나테 홍이 그 장본인으로 레나테는 지난 1954년 동독 땅을 밟았던 북한 유학생 홍옥근과 생이별한지 46년을 이렇듯 그리움으로 흘려보냈다.


레나테 홍은 1954년 화학 강의시간에 홍옥근을 처음 만났다. 홍옥근은 ‘사회주의 국제연대’를 표방했던 동독 정부의 주선으로 장학금을 받고 예나 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당시 동독 정부는 북한 뿐 아니라 베트남, 중국 등의 우수한 과학생도들에게도 장학금을 지원해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들 유학생들은 학업을 마친 후 본국으로 돌아가 국가 발전에 자신이 습득한 기술과 지식을 환원해야 했고 홍옥근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홍옥근을 만난 후 레나테는 더욱 넓은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고 둘 만의 사랑은 더욱 깊어갔다. 1937년 서독 마부르그에서 태어난 레나테는 아버지를 따라 동독 예나로 이사오게 되었고 교사였던 아버지와 같이 자신도 교사가 되길 원했다.


레나테는 대학 학생회관 내 댄스홀에서 홍옥근을 자주 만났다. 산책을 즐겼고 극장과 외식도 함께 다녔으나 늘 감시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유학생들은 외국인 거주지역에 살아야 했고 동독 후원인의 감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기숙사 방문자들의 이름은 늘 기록되었고 저녁 10시에는 돌아가야 했다.


홍옥근은 레나테에게 수학과 물리를 가르쳐 주었고 레나테는 홍옥근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며 서로의 정을 돈독히 쌓았다. 둘은 거리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더욱 가까워져갔다. 그러는 사이 레나테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1960년 2월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직후 학업을 무사히 마친 레나테는 그해 3월 교사로 임용되었다. 그해 여름에 첫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러는 사이 남편도 학업을 마치고 화학섬유공장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동독에 더 머무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런 둘 만의 꿈은 하루아침에 반전되어 버렸다. 1961년 4월 느닷없이 고국으로부터 귀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때 레나테는 둘째 아이를 갖고 있었다. 서둘러 몇 가지 책과 옷가지를 챙기고 남편은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가는 열차편에 올랐다. 10개월 된 아이를 안고 둘째 아이를 임신한 레나테는 이렇게 남편을 떠나 보냈다. 


북한으로 돌아간 홍옥근 씨는 부지런히 레나테에게 편지를 보냈고 아내도 열심히 답장을 썼다. 남편 홍옥근 씨는 항구도시 함흥에서 살고 있었다. 화학섬유 공장 실험실 책임자로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초기 남편의 편지에는 레나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을 따라 북한으로 따라 들어올 것을 기대한다고 쓰여있었다. 그러나 곧 북한에서의 일상생활이 생활여건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는 편지가 이어졌다.


홍옥근 씨는 레나테에게 다시 예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힘써 보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나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은 레나테의 요구를 거절했고 1963년 2월 26일 남편의 마지막 편지가 도착했다. “사랑하는 레나테, 당신과 아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오, 더 이상 편지를 쓰지 못할 것 같소, 오늘 편지는 내가 생존해 있다는 마지막 신호가 될 것 같소”라는 내용이었다.


독재사회에서 산다는 것에 익숙한 레나테는 이 편지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넣어 보낸 편지가 1964년 8월 20일 반송되었고 이어 “당신 때문에 걱정이 많으니, 답장 좀 해줘요”라고 쓴 편지도 역시 반송되었다.


이후 소련이나 동독은 체제전환을 추진해 왔고 스탈린 체제를 고수해온 북한과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졌다. 그러나 1989년 레나테에게 희미한 희망의 불빛이 다시 비쳤다. 동독이 붕괴되기 직전 독일에서 두 명의 북한인을 만났던 것이다. 한 명은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 직원이었고 다른 한명은 논문발표차 예나를 방문한 물리학 교수였다.


레나테는 이들을 통해 남편이 여전히 연구원으로 일하며 함흥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고 독일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 접촉해 그녀의 비극적 사연을 알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남한을 찾았다.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번 10월 2일 정상회담에서 남편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내놓았다.


1950년대 동독에는 350명의 북한 유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당시 많은 동독인들 뿐 아니라 일부 북한 유학생들도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서둘러 북한으로 소환되었다고 합니다. 이 조치로 레나테 홍은 남편과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70을 넘긴 고령의 레나테 홍의 반세기 비극이 이번 기회에 풀리기를 간절히 기원해보며 아울러 우리 사회 8만 명에 달하는 국군포로와 납북자 가족들의 슬픔도 해결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들의 고통과 슬픔도 레나테 홍 할머니의 것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IUED

 

이슈토크의 해설은 극동방송(FEBC)' 통일을 향하여'(매주 토요일 오후 8:20~9:00)에서

통일컬럼으로 방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