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토크

해설 60:통일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름, 탈북자

박상봉 박사 2007. 8. 24. 10:54

해설 60:통일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름, 탈북자


지난 8월 21일 국내외 주요언론들은 탈북자 5명이 베트남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진입해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다. 인도네시아 외교부 대변인에 따르면 이들은 “남성 1명과 여성 4명으로 이날 오후 3시경 하노이 소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들 5명은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다. 자유국가로 가고 싶다 라고 쓰여진 종이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달 7월 19일에도 6명의 탈북자가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은 작년 12월 중국 선양(瀋陽) 주재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던 열차에서 체포됐다고 합니다. 체포한 탈북자들을 강제 북송해 온 중국이 이들을 석방해 한국으로 보낸 데는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최초로 탈북자의 실체가 국내외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대 초반이다. 러시아 벌목공이었던 북한 노동자들이 간부들의 착취와 탄압을 못 이겨 작업장을 이탈하며 시작된 탈북이 이제는 10만 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들 탈북자들은 중국에 은신해 호시탐탐 남한 땅으로의 망명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10년 이상 변함이 없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 내 정치적 경제적 사정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북한 주민들이 점점 자유와 풍요로움에 대한 동경이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탈북자들의 남한 행은 그동안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초기의 탈북자들은 외교공관으로의 진입은 자살행위로 생각했다고 한다. 외교공관이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초기에 남한으로 이주했던 한 탈북자는 러시아, 유럽을 전전 긍긍하다 한 유럽 기자의 도움으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의 여행증명서를 받고 남한에 입국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1년 6월 26일 길수 가족 7명이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베이징 사무소로 진입한 것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후 탈북자들의 외교공관 진입은 남한 행의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스페인 대사관, 독일, 미국, 캐나다 대사관에 이어 한국대사관으로 탈북자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는 베이징 주재 독일학교나 일본학교들이 타깃이 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탈북난민을 강제송환하고 이들에 대한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는 국제적 비난을 받아야 했고 그 이후 중국 주재 해외공관에 대한 경계가 대폭 강화되었다. 결국 탈북자들은 몽골, 동남아 등 제3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올해 초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초기에 돈을 들여 호구를 위조해 중국 공관원의 눈길을 따돌려 남한 행 비행기를 탔던 것에 비하면 탈북자들의 남한 망명도 많이 진화한 셈이다. 


탈북자의 끊임없는 행렬은 지난 1989년 동독 탈출을 생각나게 한다. 그해 8월은 동독에게는 잔인한 달이었다. 분단 내내 줄곧 있어온 탈출이지만 이때의 탈출은 과거의 형태와는 차원이 달랐다. 과거의 탈출이 개별적으로 자유를 찾아 탈출한 경우이지만 89년도의 탈출은 우선 규모와 동기 측면에서 달랐다.


1989년 8월 8일 131명의 동독주민이 동베를린 서독대표부에 밀려들었다. 이들은 서독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을 요구했다. 체코 프라하, 폴란드 바르샤바 등 동유럽 주재 서독대사관에도 연일 서독 행을 원하는 동독주민들로 붐볐다. 대사관 정문을 폐쇄했던 조치도 소용이 없었고 급기야 서독 대사관 측은 뜰에 텐트를 치고 넘쳐나는 동독 탈출자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 세계 언론이 모여들었고 동독 내 주민들은 변해가는 세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전통 야당도시 라이프치히 니콜라이(Nikolai) 교회를 중심으로 월요일 마다 집회가 열렸고 회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호네커 공산정권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여행의 자유와 서독 행을 요구했다.


이 시기 무려 1달 만에 헝가리 정부가 열어젖힌 국경을 통해 오스트리아로 탈출한 2만4천 여 명에 달하는 동독인들은 동독의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무혈혁명을 성공시킨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탈출사건은 즉시 전 세계 언론의 초점이 되어 지구촌 곳곳에 펴져나가기 시작했다. 서독의 주요 텔레비전 8시 뉴스를 가장 신뢰하는 정보원으로 여겨왔던 동독사회에는 커다란 동요가 일게 되었다.


서독정부는 자유와 풍요로움을 찾아 떠난 동독주민들을 국민으로 보호하고 모든 외교력을 동원해 이들을 안전하게 서독 땅으로 불러들였다. 이에 자극된 동독인의 행동은 보다 적극적이 되었고 그 이후 동독인의 시위구호는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가 되어 서독과의 통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시위대의 규모도 점점 불어나 89년 10월말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동베를린의 시위에는 무려 20만 명의 동독주민들이 모여 반공산당 구호와 서독과의 통합을 외쳐댔다. 이 외침이 베를린 장벽을 철거하고 동독 내 민주정권을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드디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이 무너져 내렸다. 28년 동안이나 동서독을 가르고 수많은 분단의 아픔을 초래했던 높이 3.6m 총연장 155km의 콘크리트 장벽도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이렇듯 자유와 풍요로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존재하는 한 탈북자의 행렬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지난 인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귀중한 교훈이다.

I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