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재건

북한재산관리위원회와 트로이한트

박상봉 박사 2006. 12. 26. 16:59
 

북한재산관리위원회와 트로이한트


독일통일은 우리에게는 역사가 부여해준 기회이다.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개척자의 길은 장애도 많고 수많은 시행착오도 겪는 법이다. 독일이 통일을 완성해가며 겪어가는 과정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너무도 귀한 교훈들이다. 통일 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가며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독일의 교훈, 특히 정책적 실책과 시행착오를 면밀히 파악해 남북통일에 대비한다면 많은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독일통일에 앞서 이런 체제 간 통합이 세계사에 있었다면 우리는 많은 실책과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독일인의 이해와 협조를 구했던 헬무트 콜 총리의 고백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재산관리위원회(북재위)는 독일의 트로이한트(신탁관리청)에 해당되는 북한 인민재산에 대한 사유화 담당기관이다. 북재위는 역사상 최초의 한 국가에 대한 사유화를 추진했던 독일의 트로이한트의 업적과 실수를 잘 검토해 보다 성공적인 사유화를 추진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역사적 기회이자 우리에 앞서 통일된 독일로부터 얻어야할 교훈이다.

우선 독일의 트로이한트가 범한 실책을 통해 북재위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 이미 NEPK모델의 N 영역에서 트로이한트의 장․단점을 여러 각도로 분석해 우리 실정에 맞는 북한재산에 대한 평가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트로이한트의 설립초기 어떤 정책적 오류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초기 트로이한트의 오류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1. 설립목적의 불투명


트로이한트는 1989년 가을 동독시민들의 대규모 탈출로 인하여 호네커 총서기장이 지난 40년간 의 통치에 종말을 선언한 지 6개월만인 1990년 3월 1일, 크렌츠에 이어 동독 정부를 이끌던 개혁 공산주의자 한스 모드로브(Hans Modrow) 총리 집권 하에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이 기관의 목적이 단순히 동독재산에 대한 관리를 위한 것에 있었으며 이 기관이 차후 동독경제를 효율적으로 이끌어낼 작업을 담당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경제통합과 체제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불합리하고 불명확한 정책이었으며 이러한 불투명한 설립목적으로 동독 체제의 전환작업은 이미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고 시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1년여의 시간을 통일정책적 차원에서 가장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으로 허비하였다.


2. 트로이한트의 조직 구성원


모드로브(Modrow) 총리 하에서 설립된 초기 트로이한트는 대다수 구 공산당 사통당(SED)의 핵심간부들로 충원되었다. 이것은 그때까지도 사회의 주요 요직들을 당에서 장악하고 있었고 비록 동독의 호네커 정권이 붕괴했다 해도 당이 관리하던 재산은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의도 때문이었다.

공산세력들의 힘 겨루기는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를 통해 총리직에 오른 로타 드메지어가 정권을 인수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동독주민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양독 지도자들의 합의 하에 통일의 일정이 가시화되자 구 공산당들의 세력 지키기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게다가 양독 정부간 90년 5월 18일에 체결한 동서독간 화폐․경제․사회통합은 이들의 마지막 힘까지도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이 통합협약은 동서독이 완전통합을 이루는 직전 단계로 동독 전역에 서독 마르크화를 도입함으로 모든 경제활동의 기준이 서독에 맞추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조치였다. 이때야 비로소 드메지어 총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탁월한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하여 구체적인 트로이한트의 임무를 확정짓게 되었다. 그리고 서독의 전문 경영인들과 경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트로이한트의 이사진을 선임하기 시작하였고 대표에 데프레프 카르스텐 로베더(Detlev Karsten Rohwedder)를 임명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로베더야말로 트로이한트의 실질적인 초대 대표였다. - 로베더는 대표가 된 후 보다 철저하게 트로이한트를 이끌다 91년 4월 1일 동독 안전부 요원과 적군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는 부활절 휴가를 맞아 뒤셀도르프 자택에서 생활하던 중 동독 안전부 요원과 적군파가 초정밀 소총으로 정원 쪽에서 창문을 향해 발사한 총탄에 의해 정확하게 뇌를 맞고 사망하고 말았다.-

로베더는 대표로 임명되자 트로이한트 법을 개정 발표하고 보다 구체적인 사유화 작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를 근거로 한 트로이한트는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동독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의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중단하고 기업활동에 개입해오던 관행을 중단한다.

기업에 대한 국가지원은 철폐될 것이고 기업은 자체 경쟁력을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


3, 전문지식이 결여된 통치권자의 개혁의지


트로이한트가 설립되었지만 당시 모드로브 총리는 이 기관의 본질과 중요성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개혁을 내걸고 출범한 모드로브 정부였지만 외국기업들과의 합작에도 여러 제한규정을 두었음은 물론이고 서독기업들과의 합작에 관한 법률에서도 서독기업을 외국회사로 규정해 합작회사의 자본비율 49%를 초과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자본에 대한 규제를 해나갔다.

모드로브 정권은 이미 동구의 체제전환 과정에서도 밝혀진 바 있는 개혁과정에 있어서 자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지 못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동독은 사회주의 체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했다. 모드로브 총리 역시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개혁하여 보다 효율적인 사회주의의 모습을 추구하였지만 국민의 진정한 소망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국민은 보다 구체적인 정책을 원했고 통치권자는 개혁에 대한 의지만을 강조하므로 트로이한트의 사유화 작업은 그 출발부터 소극적으로 되고 말았다


4, 트로이한트의 위상


이 문제는 설립당시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트로이한트가 본래의 임무를 마무리 짓고 새로운 조직으로 변해있는 지금 이 시점에도 해당되는 사안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트로이한트를 재무부 산하에 귀속시켰다는 사실이다.

물론 트로이한트는 해당법을 근거로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아 대규모 사유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하도록 배려하기는 하였지만 한나라 전체를 사유화 시켜 체제전환을 이루어낸다는 역사적 작업을 감당하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지원과 관리가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얼마 전에 있었던 동독 조선소들을 인수한 브레멘 훌칸 사가 도산 위기에 처하게 되어 트로이한트가 야심있게 추진했던 동독 조선산업에 대한 사유화 작업이 실패로 끝날 형편에 이르게 된 이유도 트로이한트가 지나치게 동독기업의 민영화 작업 자체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의미에서 트로이한트의 사유화 작업이 국민 경제적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사유화 기관에 대한 더욱 적절한 조직적인 배려가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5, 초기 트로이한트의 개혁 작업


구제대상 기업의 부정확한 선정으로 90년 7월 1일 화폐통합 이후 250억 마르크 (한화 약 13조원)라고 하는 자금을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기업을 지원하는데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근 반세기를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해온 한 국가를 새로운 체제로 전환시키는 작업은 보다 냉정한 이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평가 기준에 미달되는 회사나 미래의 기업 경쟁력이 불확실한 회사에 대한 섣부른 지원은 매우 심각한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은 트로이한트의 설립 초기에 주로 발생했던 실책들로 북재위의 설립초기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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