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민족주의 망령

박상봉 박사 2006. 12. 7. 16:19

 민족주의의 망령

- 시민의식을 일깨운 뮌헨 횃불시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새로운 체제를 수용하면서 나타났던 공통적인 현상은 새로운 민족주의의 부활이었다. 민족주의의 망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동반했던 체제전환기의 동구권은 냉전이 끝남에 따라 국민으로부터 붕괴한 사회주의 사상을 대체해 줄 새로운 사상이 부재했고 그 자리에 민족주의가 들어서게 되었다. 구 소비에트 연방체제와 유고연방이 해체되고 여러 독립국가로 다시 탄생한 것도 이런 정신적 공허감으로부터 발호한 민족주의의 망령 때문이었다.

동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유와 시장경제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받아온 동독인에게 통일된 사회의 상황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정신적 공허감과 공황상태를 다음 두 가지로 채웠다. 하나는 서독의 풍요로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치즘이라는 국수적 민족주의였다.


초기 동독인들은 서독의 자동차, 가전제품, 의류 등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손에 쥐어진 돈으로 과거 동독시절에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로움을 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당시 서독의 중고자동차는 동독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분단 시절 서독과 서베를린 통과구간에서의 열등의식을 보상이라도 하듯 어떻게 해서든지 서독 자동차를 손에 넣고자 했다.

물질적 풍요로움 못지 않게 동독인의 정신적 공허감을 채워준 것이 민족주의였다. 무엇보다도 사춘기 청소년들은 나치즘을 동경하였고 동독지역 곳곳에 네오나치라고 하는 히틀러를 추종하는 청소년들의 그룹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네오나치들은 산 속에서 집단훈련을 실시했고 외국인 테러를 위한 모의 훈련을 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동독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 근로자들은 네오나치들의 주 표적이 되었고 통일 직후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네오나치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작센 州의 호이어스베르더(Hoyerswerder)는 통일 직후 네오나치들의 민족주의 망령의 부활에 시동을 건 도시였다. 동독 청소년들이 외국인 거주지역을 방화하고 외국인을 추방하라고 요구하는 집단시위를 벌였다. TV 화면에는 불길 뒤쪽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흑인과 베트남 인들의 모습이 연일 방영되기도 했다.


통일 후 민간에 이양된 동독 기업이 구조조정을 통해 많은 실업을 초래했던 것도 당시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에 불을 지폈다. 호이어스베르더 외국인 숙소 방화사건에 이어 네오나치들의 테러가 계속됐고 93년까지 무려 21명의 외국인이 이들의 손에 희생되었다. 1992년 3월 15일 구동독 북부 메클렌부르그에서는 청소년들이 루마니아 청년을 집단구타해 살해했고 3일 후인 18일과 19일에는 히틀러와 스킨헤즈(네오나치)를 욕했다는 이유로 2명을 공격해 살해했다. 이후에도 베트남 청년,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온 폴란드인, 유고인들이 살해됐고 이미 독일에 이주해 정착해 살고있는 외국인들도 공격의 대상이었다.

또한 네오나치들의 테러는 동독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독에서도 이들의 테러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져 히틀러 시절 지하운동이었던 ‘흰장미(Weisse Rose)’ 운동에 뿌리를 둔 횃불시위가 뮌헨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서독의 졸링겐 방화사건으로 터키 여성과 아이 등 6명이 사망한 사건은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독일통일은 우리에게 통일 후 주체사상의 붕괴로 심한 정신적 공허감에 시달릴 북한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준비와 대책이 필요하다고 교훈하고 있다.

IUED

 

   

 

◇통일 후 동독지역을 중심으로 번져가고 있던 네오나치들의 모습. 통일 초기 이들은 21명의 외국인들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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