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현대판 엑소더스의 喜悲

박상봉 박사 2006. 11. 27. 15:42
 

현대판 엑소더스의 喜悲

- 통일은 분단 고통의 싹들이 모아진 것


1961년 8월 13일 새벽, 베를린과 동서독 국경지역에 무장을 한 동독군인들이 나타나 철조망과 차단시설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동독 정권이 이렇듯 불시에 국경을 통제하고 장벽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의도가 사전에 드러날 경우 동독인들이 한꺼번에 서독으로 몰려들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울브리히트 총서기는 불과 두 달 전인 6월 15일 “Niemand hat Absicht, eine Mauer zu errichten (아무도 장벽을 설치할 의도가 없다)”는 정부의 입장을 기자회견을 통해 전달한 바 있었다. - 이것은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기 위한 하나의 제스추어에 불과했다. 이를 시작으로 베를린 장벽은 숱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장벽이 설치되기 시작한 지 3일만에 국경경비대원 1명이 철조망을 건너 서독으로 탈출했고 우연히 이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 사진은 곧바로 전세계로 퍼졌고 그때부터 동독청년들은 서독탈출이라는 희망을 품고 국경경비대원에 지원하기도 했다.


동독인에게 3.6m의 장벽은 에베레스트 정상보다 더 오르기 힘든 ‘魔의 벽’이었다. 이 마의 벽을 넘기 위한 동독인들의 노력은 아직도 온 인류의 마음 속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25세 헬케 디트리히의 탈출은 자유와 사랑의 소줌함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헬케는 2년 연상의 서독인 남자친구 베르너를 따라 동독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베르너는 여자친구 헬케를 2개의 서핑보드 사이에 누이고 자신의 르노 차 지붕 위에 얹어 잘 묶었다. 국경에 도착해 자연스럽게 패스포드를 제시하고 3, 4m 앞의 서독 땅을 바라보았다. 국경대원은 별다른 경계 없이 르노를 통과시켰고 헬케의 탈출은 성공했다.

1987년 5월 어머니 트라우체텔(Trauzettel) 씨는 네 살난 아들 미케(Mike)를 바퀴달린 여행가방에 숨겼다. 서독에 단기체류 허가를 받은 어머니가 어린 아들과 함께 서독탈출을 결심하고 아이를 숨긴 채 국경 통과라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 모험은 성공했고 모녀는 서독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자 20세기 냉전의 현장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청년들의 이야기로 더욱 유명하다. 

최초의 희생자는 1961년 8월 24일 베를린 장벽에서 사살된 귄터 리트핀(Guenter Litfin)으로 장벽이 설치되기 시작한 지 11일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희생자는 1989년 2월 6일 새벽 친구와 함께 베를린 장벽을 넘어 하천을 따라 서베를린으로 헤엄치던 중 동독 국경경비대에 의해 사살된 크리스 구에프로이(Chris Gueffroy)였다. 그는 모두 10여발의 총탄을 맞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죽음은 “불과 몇 달만 기다렸어도 자유롭게 서독 땅을 밟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사람들의 안타까움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1962년 8월 17일 사살된 페터 훼히터(Peter Fechter)의 죽음은 분단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장 잘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페터는 탈출을 시도하다 총탄을 맞은 채로 50분간 사경을 헤매며 도움을 청했으나 위험지역이라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다. 보다 못한 한 아주머니가 응급처치 약통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기진맥진했던 페터는 약통을 잡지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흥분했고 국경으로 몰려가 국경경비대원에게 돌팔매를 했다고 한다. 통일은 이런 분단의 고통의 싹들이 모아져 이루어낸 것이다.

IUED

 

    

 

◇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국경 브란덴부르크 문을 동독 무장군인들이 점거 통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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