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컬럼 및 논단

베를린장벽을 철거한 동독 탈출

박상봉 박사 2006. 5. 12. 18:31
 

베를린 장벽을 철거한 동독탈출


동독인의 탈출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역사적 흔적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었다. 높이 3.6m 총연장 155km에 달했던 베를린 장벽은 지난 1961년 동독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설치됐다. 베를린 장벽은 또한 1949년 동독이 건국된 이후 서독행의 통로도 봉쇄시켰다. 베를린 장벽이 28년만인 1989년 11월 9일 철거되자 막혔던 서독 이주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1986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함께 동유럽에는 개혁의 물결이 몰려들었고 동독인의 탈출이 시작되었다. 동독인에게 개혁과 개방은 서독을 향한 탈출로 표출되었다. 1989년 8월 8일 131명의 동독인이 동베를린 서독대표부에 진입함을 시발로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 소재 서독대사관에는 연일 서독을 목표로 동독을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또한 이 탈출은 사회주의의 결핍과 억압을 거부한 역사적 현상이었고 자유와 풍요로움을 찾아 떠나는 결단이었다.


무엇보다도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탈출한 2만4천여명의 동독인들은 이런 개혁의 시기에 가장 의미있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9년 8월 19일 헝가리 정부는 범유럽 유니온과 헝가리 민주단체가 공동주최한 한 평화축제행사를 위해 3시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토록 했다. 당시 이 행사에 참가했던 6백여명의 동독인들이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탈출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서독 정부는 특사를 파견해 헝가리 정부가 영원히 국경을 개방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고 헝가리 정부는 서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달만에 2만4천여명의 동독인이 오스트리아를 경유해 서독 땅을 밟았다.

이 탈출사건들은 즉시 전 세계언론의 초점이 되어 지구촌 곳곳에 펴져나가기 시작했다. 서독의 주요 텔레비전 8시 뉴스시간을 가장 신뢰하는 정보원으로 여겨왔던 동독사회에는 커다란 동요가 일게 되었다.


전통 야당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데모는 양적 질적으로 점점 확대되어 갔다. 초기 서독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을 허가하라는 요구가 점점 사회주의 통일당 SED에 대한 저항으로 변했다. 서독정부는 자유와 풍요로움을 찾아 떠난 동독주민들을 국민으로 보호하고 모든 외교력을 동원해 이들을 무리없이 서독 땅으로 불러들였다. 이에 자극된 동독인의 행동은 보다 적극적이 되었고 그 이후 동독인의 시위구호는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로 되어 서독과의 통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시위대의 규모도 점점 불어나 라이프찌히를 비롯한 동베를린의 시위에는 무려 20만명의 동독인이 모여 반공산당 구호와 서독과의 통합을 외쳐댔다. 이 외침이 베를린 장벽을 철거하고 동독 내 민주정권을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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