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컬럼 및 논단

동독 탈출자와 동유럽 민주화

박상봉 박사 2007. 4. 5. 11:37
 동독 탈출자와 동유럽 민주화


탈북자 1만명 시대를 맞이했다. 1994년 41명에 불과했던 탈북자가 2002년부터는 해마다 1천명을 훌쩍 넘기고 1만명이 된 것이다. 탈북자의 남한 이주는 같은 분단국이었던 독일의 사례를 통해 이미 예상된 일이기도 하다. 독일은 1949년 동독에 공산체제가 수립되어 분단된 후부터 서독으로의 탈출이 시작됐다.

독일은 우리의 상황과는 달리 패전 독일을 점령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의해 양분되었다. 서베를린을 포함한 서독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승전국 지위로 주둔했던 반면, 동독에는 소련이 점령군으로 입성했다.

하지만 한반도나 독일이나 분단상황은 체제를 둘러싼 경쟁을 불러왔다. 주민들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통제사회, 부족한 사회, 공산독재가 지배하는 사회를 떠나 자유롭고 풍요로운 사회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주민들의 탈출은 베를린장벽의 해체를 불러왔고 이제 한반도 분단의 극복을 예고하고 있다. 동독에 민주화를 촉발시키고 통일을 불러왔다. 체코, 폴란드, 루마니아 등 잠자고 있던 동유럽의 시민의식을 일깨웠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스크, 체코의 카르타77, 동독 라이프치히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와 같은 민주화운동을 역사의 주류로 만들어갔다.


탈출자 3가지 유형


동독 탈출자는 그 의미와 성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첫째, 1950년 분단 후부터 1961년 베를린장벽 건립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국경 통제가 엄격하지 않았고 동서독 친지, 가족 사이에 방문이 비교적 자유로왔으나 정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벌어졌던 냉전의 시기였다.

시간이 지나며 양독 간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에 있어서 차이가 가시화되었고 나은 삶을 찾아 양독 주민들 사이에 광범위한 이주가 이루어졌다.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이주는 물론이고 역으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380여만명이 이주하였고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이주도 40만건에 달했다.

둘째, 1961년에서 1989년 중반까지 발생한 경우이다. 1961년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해다. 과도한 인구 유출을 걱정한 동독의 울브리히트 서기장이 장벽을 세워 서독행을 본격적으로 차단하고 나선 것이다. 이후 서독 이주는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연금수혜자의 서독 방문이 가능했으나 젊은이들이나 능력있는 주민들의 서독행은 목숨을 담보해야 했다.

셋째, 1989년 8월 초부터 발생했던 탈출이다. 이 유형은 체제에 대한 정면도전과 같았다. 반공구호가 등장하고 서독과의 통일을 염원하는 탈출이었다. 탈출자들은 동베를린 서독 대표부, 폴란드나 체코의 서독대사관으로 진입했고 헝가리의 오스트리아 국경을 경유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무엇보다도 이 마지막 유형이 가장 직접적으로 동독에 민주화를 촉진시켰고 결국 공산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연도

동독 -> 서독

서독 -> 동독

1950 ~ 1961

385만명

40만명

1962 ~ 1988

63만명

  7만명

‘89  ~ 89.11.9

53만명*

0

시기별 이주자 현황

      출처: 내독성 (*53만명 중에는 동유럽거주 독일혈통 30만명 포함)


동독 및 동유럽의 민주화운동


동독인의 탈출과 이주는 동독사회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도록 유도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에 짓눌려있던 동유럽 사회의 시민의식을 깨우는 데도 일조했다. 1953년 동독의 민중봉기, 1968년 프라하의 봄, 1977년 카르타77, 1980년 솔리다르노스크, 1989년 라이프치히 월요데모, 베를린장벽붕괴로 이어지며 시민정신의 힘, 민주화의 역동성을 만들어갔다.


▲ 탈출의 의미


동독인의 탈출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동독으로서는 체제경쟁에서 낙오했음을 뜻했고 이에 대한 방치는 국가의 몰락이었다. 1961년 베를린장벽을 한 달만에 세운 것은 동독 공산정권의 조급함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서독은 동독에서의 엑소더스를 보며 통제사회의 진면목을 확인했고 동독주민에 대한 동포애와 연민을 갖게 되었다. 정치범 석방을 위해 서독정부를 압박했고 동독의 가족 친지들에게 돈과 선물을 보냈다. 장벽을 넘다 사살된 탈출자들을 위해 추모비를 세우고 국경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분단의 비극을 알렸다. 정부도 동독주민의 고통에 침묵할 수 없었다. 정치범 33,755명을 석방 이주시키는 댓가로 34억 DM(대략 17억 달러)를 지불했다. 분단의 고통을 완화해주는 정책들 베를린 통행협정, 우편협정, 청소년 교류, 주민왕래 등이 체결되었다. 동독의 공산정권은 경제적 댓가를 얻었고 서독정부는 주민들이 겪는 분단의 고통을 위로해 주었다.


동서독 간 방문객 수 (단위: 천명)

서독 -> 동독

동독 -> 서독

내용

90,774

(1970~1986)

27,625

(1970~1987)

1.서독 방문객은 가족 친지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동독 방문객 중에는 노인이나 병약자 등 연금수혜자가 대다수였다. 이들 중에는 동독으로 귀향하지 않고 서독에 안주한 사람들도 많았다.

2.방문객 수에는 1988년 이후 발생한 대규모 탈출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출처 : 내독성 자료


▲ 동유럽 민주화


베를린장벽을 넘다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제사회는 동독의 만행을 규탄하게 되었다. 서독사회는 동독인에 대한 연민을 이어갔고 동독사회 내부는 공산체제에 대한 환멸이 쌓여갔다. 민주화의 열기는 무차별한 탄압 속에서도 하나 둘 그 명맥을 이어갔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만들었던 체코인의 민주화 열기는 1977년 시민들의 민주선언인 카르타 77로 새롭게 태어났다. 1980년에는 바웬사를 중심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노조 솔리다르노스크가 폴란드에서 설립되었다.

이런 가운데 고르바초프의 등장은 민주화 열기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의 물결이 동유럽을 강타했고 체코,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은 정치적 민주화와 체제전환의 바람이 불었다. 

특히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동유럽에 공산정권을 사라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체스쿠가 처형되었고 헝가리는 동독인들에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해 통일의 물꼬를 터주었다. 폴란드에서는 솔리다르노스크를 이끌던 바웬사가 대통령이 되고 체코에서는 민주인사 하벨이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이렇듯 동독인의 탈출은 한편으로는 서독 및 국제사회에 공산정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 민주화의 불씨가 살아타도록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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