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컬럼 및 논단

동서독 교류협력과 서독의 인권정책

박상봉 박사 2005. 12. 22. 11:01
 

동서독 교류협력과 서독의 인권정책


동서독의 교류 협력은 동독의 정치적 이해와 서독이 전면에 내세운 인도주의적 조치들이

상호 교환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교류는 두 체제의 평화 공존을 영원히 가능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하지만 동서독 평화공존은 실현되지 못했고,

어느 날 상대적으로 우월했던 서독 체제가 동독으로 확대되는 모습으로 두 체제는 통합을 이루었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유, 인권, 생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서독의 동독에 대한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인권은 인류가 공동으로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 함은 어떠한 시대적 여건과 상황하에서도 인류는 이 가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가치는 또한 한 나라의 정체성과 그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유태인을 학살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던 히틀러 나치정권도, 흑인의 인권을 무시하고 백인의 정부를 계획했던 남아공의 민족 차별주의도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 역사 속에서 인권, 생명, 자유 등과 같은 가치들을 무시한 나라들의 몰락을 볼 수 있으며, 독재와 억압, 사기와 기만은 결코 영속성을 갖지 못한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진리는 동서독 사이의 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체제경쟁을 벌여온 동서독은 이러한 인류 보편적 가치가 실현된 정도에 따라 체제 간 우열도 갈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동서독 관계는 1972년 기본조약이 체결된 이래 꾸준히 발전되었다. 통신협정이 맺어지고 급기야 동서독 주민간의 왕래도 성사되었다. 이렇듯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확대되었던 동서독 교류협력은 두 가지 커다란 이해관계 속에서 추진되었다. 하나는 동독정부의 정치적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서독 정부의 인도주의적 차원이다. 1949년 동독 땅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후, 동독의 정치지도자들은 서독의 할슈타인 정책에 대항해 동독도 하나의 국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열망하였다. 이 열망은 서독의 완강한 입장에 부딪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에곤 바르, 빌리 브란트를 중심으로 한 대동독 화해정책에 힘입어 서서히 실현되어 갔다. 서독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고, 서방들과의 외교적 관계도 수립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동독 정부가 서독과의 교류 협력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한 반면, 서독 정부는 동독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동서독 주민들의 인권과 자유를 확대하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동서독의 교류가 확대되고 서독정부의 대동독 지원이 성사됨에 따라 동서독 주민들 간의 왕래는 더욱 빈번해지고, 국경에 설치되어 있던 살상무기들도 부분적으로 철거되곤 하였다. 서신교환이 가능해졌고 동서독 간에 통신협정이 맺어져 방송이 교환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동서독의 교류 협력은 동독의 정치적 이해에 서독이 전면에 내세운 인도주의적 조치들이 상호 교환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교류는 두 체제의 평화 공존을 영원히 가능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하지만 동서독 평화공존은 실현되지 못했고, 어느 날 상대적으로 우월했던 서독 체제가 동독으로 확대되는 모습으로 두 체제는 통합을 이루었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인권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서독의 동독에 대한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분단상황 속에서 서독이 추진했던 인권정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분단 상황 속에서 추진되어진 교류 협력의 과정과 둘째, 동독 탈출자들에 대한 서독정부의 대응이다.



분단상황 하에서의 동서독 교류 협력


- 1972년도에는 동서독 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되어, 서베를린 주민들은 언제든지 동독을 수시로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복수 비자도 허용되었다. 게다가 그해 10월에는 동독정권이 동독을 탈출한 자들에게 더 이상 동독 국적을 묻지 않음으로 형사책임을 불문에 붙이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동서독 간 교류 협력은 1969년 10월 브란트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다. 브란트가 수상에 취임하자, 당시 동독의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그 해 12월 서한을 보내, 이제는 동서독이 동등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나가야 함을 주장하며 동서독 정상회담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브란트 총리는 몇 가지 전제를 달고 회담을 수락하였다. 1) 유럽의 평화질서 속에서 독일의 통일과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2) 서베를린은 엄연한 서독의 영토이다. 3)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권리와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동독의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독일통일 문제에 이견을 제시하고, 이 회담제의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70년 1월 빌리 브란트 총리는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동베를린에서 실무 당국자 간 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슈토프 총리는 회담장소를 동베를린이 아닌 에어푸르트에서 갖자고 수정제의 하였다. 이에 브란트 총리는 다음 4가지 사항을 요구하며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1) 동서독 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닌 특수관계의 성격. 2)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전승국의 의견 존중. 3)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 4) 모든 분야에 대한 동서 간 교류 강화.


슈토프 동독 총리는 이중 첫 번째를 제외한 요구사항에 동의함에 따라, 동서독 간 처음으로 이산가족 만남을 포함한 교류 협력에 대한 가능성이 마련되었다. 이후 동서독 당국자 간 실무회담과 우편통신 협정이 체결되고, 71년 말에는 동서독 간 통행협정이 체결되어 화물통행과 함께 친지들에 대한 방문이 가능하게 되는 등 동서독 사이의 관계가 완화되게 되었다. 특히, 1972년도에는 동서독 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되어, 서베를린 주민들은 언제든지 동독을 수시로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복수 비자도 허용되었다. 게다가 그해 10월에는 동독정권이 동독을 탈출한 자들에게 더 이상 동독 국적을 묻지 않음으로 형사책임을 불문에 붙이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동독정부도 동독주민들이 비록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서독방문을 허가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을 '접근을 통한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접근을 통한 변화 (Wandel durch Annaehrung)


- '접근을 통한 변화'는 모든 통일논의의 기본전략이 되었으며, 1989년 동독인의 대탈출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 위기에 처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동독탈출은 변화가 접근을 강요하게된 직접적인 사건이었다.


정치적 이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서독정부는 동서독 간 상호교류는 통일과 무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접근을 통한 변화'를 대동독 정책의 원칙으로 삼는다. 그로 인해 동독과의 다양한 교류와 접근이 추진되었고,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접근을 통한 변화'는 모든 통일논의의 기본전략이 되었으며, 1989년 동독인의 대탈출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 위기에 처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서베를린-서독 간 통행협정, 독소조약, 대동유럽 국가들의 관계 개선 등이 추진되었고, 1972년 12월 21일에는 '동서독 관계에 대한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국관계는 정상화 될 수 있었고, 불가능하게 보였던 재통일의 실질적인 여건도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브란트가 야심적으로 추진한 동서독 간 기본합의서의 핵심사항은 다음과 같다.


▲ 양국은 동등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이웃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 각국의 국경을 존중하며 모든 폭력을 삼가한다.

▲ 양국은 유럽의 안보와 협력을 지원하며 군비축소라는 국제적 여망에 부응토록 한다.

▲ 양국의 주권을 존중하며 쌍방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인정한다.

▲ 서독이 고수하던 유일국가론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

▲ 대표부를 상호 교환하고 동서독의 유엔 가입을 추진한다.

▲ 동서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들을 마련한다.

▲ 여행의 제한조치를 점차 해제하며 쌍방 국경지역에 통로를 마련한다.


이 내용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동서독 간 두 가지 차원에서 합의되었다. 즉, 국가로 인정해 달라는 동독의 요구에 이산가족의 재회를 포함한 여행의 자유 등 국민의 실생활에 필요한 가치들을 관철해내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합의과정에서 서독정부의 정치적 이해가 일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서독의 입장으로서 국제적 신뢰를 회복하는 일도 급선무였고, 헌법이 부여하고 있는 통일 문제를 간과할 수도 없었다. 기본합의서에 대한 정계의 민감한 반응도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기본합의서를 두고 당시 야당이었던 기민련과 기사련은 이러한 사민당 정부의 입장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야당은 동서독 간의 기본합의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소하고 그에 대한 위헌 여부를 물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야당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기각하였고, 기각 이유를 이 동서독 간 기본합의서 만으로 서독정부가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정하였다.

실제로 많은 협정이 체결되고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서독이 동독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대동독 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외교관계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동서독 간에 교환한 상주대표부도 동독은 외무성에 소속시켰던 반면, 서독은 수상실 산하에 두도록 하였다.



브란트에서 콜 총리까지


- 동서독 통일은 브란트에 의해서 시작되어 헬무트 콜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현장을 목격하게 하시고 독일 국민들과 통일의 과정 과정을 함께 나누고 동참하게 해주셔서...."라는 브란트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전쟁, 분단 그리고 통일이라고 하는 격정의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참과 진리의 편에서 독일 사회를 이끌었던 모습을 보게된다.


1969년 집권 초기 에곤 바르를 연방총리실 차관으로 임명한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의 실질적인 주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정치가 브란트는 그의 청년시절에서도 보듯이 투철한 정치철학과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독일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큰 역할을 감당해내는 큰 인물이다.

그가 내려야 했던 정치적 결단의 순간에는 늘 자유, 생명, 인권과 같은 가치들이 큰 영향력을 끼쳤고, 그로 인한 그의 결단은 늘 세계 역사의 중요한 순간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1913년 생인 청년 브란트는 스칸디나비아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전쟁이 종결되자 조국을 다시 찾은 브란트는 1957년 분단의 상징이며 냉전의 도시인 베를린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시장으로서 브란트가 추진한 일들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역량을 암시하는 것들이었다. '베를린 정책에 관한 4가지 기본원칙'을 만들어 어정쩡하였던 베를린의 위상을 분명히 하였다. 기본원칙을 통하여 브란트 시장은 서베를린은 자유민주국가이며, 베를린 시민은 어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율권을 갖는다고 선포함과 동시에 4대 전승국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였다.


또한, 1961년에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할 것에 합의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획기적인 정책을 통하여 평화와 공존, 그리고 주권 회복과 평화적 통일을 위한 브란트의 현실정치를 보게된다. 1969년 연방수상으로 선출된 브란트는 동독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회담이 열렸던 에어푸르트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이 기회를 이용해 개인적으로 부흐발트에 위치한 나치 수용소를 방문체류하며, 나치 정권의 만행에 대한 사죄의 기회로 삼았다.

그가 제시한 획기적인 동방정책은 냉전으로 대립되어 있는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도 국가의 정통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또한 냉전상황 속에서 이미 전 세계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주의권을 인정하고, 그 체제 하에서의 발전가능성도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인식으로부터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동독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외교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할슈타인 원칙은 시대적 흐름에 역행한다고 믿었고, 당시의 상황 속에서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화해와 협력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71년 노르웨이 의회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브란트를 선출하였다. 정직한 양심과 불굴의 투지로 과거 적대국들에 화해의 악수를 내밀어 유럽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선정 이유였으며, 노벨 평화상 선정과정에서 이렇듯 쉽게 수상자가 결정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브란트의 업적은 탁월한 것으로 유럽 및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동서독 통일은 브란트에 의해서 시작되어 헬무트 콜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현장을 목격하게 하시고 독일 국민들과 통일의 과정 과정을 함께 나누고 동참하게 해주셔서...."라는 브란트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전쟁, 분단 그리고 통일이라고 하는 격정의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참과 진리의 편에서 독일 사회를 이끌었던 모습을 보게된다.

1982년 집권한 기민련의 헬무트 콜 수상은 기존의 노선을 견지하며 보다 적극적인 대동독 정책을 추진하였다. 1983년에는 10억 DM에 달하는 차관을 제공하는 동시에 당시 이미 8년이나 중단되었던 문화협정을 재개시키고, 동서독 국경에 설치되어 있던 자동 발사 기관총을 부분적으로나마 해체토록 하였다. 1984년도에는 동유럽 주재 서독대사관에 동독인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서독정부의 도움으로 모두 서독 사회로 귀순하였다.

1984년도에는 서독정부의 보증 하에 9.5억 DM의 유로차관을 동독 정부에 제공하였고, 이를 계기로 서독정부는 여행 통제를 완화토록 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30일에는 동서독 국경에 설치되어있던 자동기관단총이 전면 해체되기도 하였다. 1984년 한해동안 동독 정부가 서독여행을 허가한 건수는 총 34,900명에 달하며, 이 수는 1983년도 7,700명에 비해 거의 5배에 달하는 숫자이다.



동서독 교류협력의 원칙과 실상


- 동서 교류협력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중요한 원칙은 서독 정부의 모든 대동독 교류와 관계가 서독의 기본법에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질서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독정부는 헌법수호청을 두어 기본법의 질서를 확립하였고, 이에 위배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지난 1974년 수상실 직원이었던 기욤이 서독의 주요 정보를 동독에 제공한 혐의가 드러나 브란트 수상이 사임하게 된 것이 바로 좋은 예이며, 국가의 정체성을 잃은 동서독 교류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일깨우는 대목이다.


이상과 같이 동서독 교류협력의 원칙은 동독의 정치적 급부에 대한 서독정부의 인권, 자유 등과 같은 반대급부의 모습이다. 이것은 브란트 총리에서부터 통일을 이루어낸 콜 총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동독이 줄곧 요구했던 정치적 급부는 초기 서독의 대동독 정책이었던 동독에 대한 외교적 고립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나타난다. 아데나워 정부의 외무장관이었던 할슈타인에 의해서 확립된 동독 고립주의는 동독으로 하여금 국제사회로의 진출을 어렵게 하는 등 동독에 늘 부담으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동서독의 대립과 갈등은 분단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과 비인도주의적 사건이 빈번해짐에 따라 서서히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동독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바르샤바 동맹의 일원이 되었고,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주요 동맹국이 되어 집단동맹 체제의 대결 구도가 진행되었다. 게다가 국내적 상황은 동독인의 서독 탈출이 지속되고, 이산가족의 고통과 베를린 장벽을 둘러싼 갈등이 분단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독정부는 동서독 간의 교류협력은 분단된 체제 하에서 고통받는 이산가족과 실향민을 염두에 두고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교류의 양적 질적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인도주의적 과제들도 점차 개선되었다. 물론 동독과의 교류 확대를 통한 서독 정부의 정치적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류의 과정에서 이루어낸 인도주의적 성과들은 하나의 원칙으로 동서독 교류 과정 속에서 자리잡아 갔다.

동서 교류협력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중요한 원칙은 서독 정부의 모든 대동독 교류와 관계가 서독의 기본법에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질서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독정부는 헌법수호청을 두어 기본법의 질서를 확립하였고, 이에 위배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지난 1974년 수상실 직원이었던 기욤이 서독의 주요 정보를 동독에 제공한 혐의가 드러나 브란트 수상이 사임하게 된 것이 바로 좋은 예이며, 국가의 정체성을 잃은 동서독 교류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일깨우는 대목이다.


동독탈출자와 서독정부


- 라이프찌히에서는 월요일마다 시위대가 일어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월요데모는 점점 조직화, 대형화되어 갔다. '우리가 국민이다!' 라는 구호는 어느 새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구호로 바뀌었으며, 이 사건은 더 이상 동독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탈출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바르샤바, 프라하 소재 서독대사관에는 자유를 요구하는 동독인들로 꽉 차 있었다.


동독인의 탈출은 1949년 동독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분단 초기 동독 정부는 공산정권의 합법성을 드러내기 위한 다양한 유화책을 펼친 바 있다. 하지만 자유가 유보된 사회의 한계가 점점 드러나게 되었고, 동독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독행을 택하였다. 당시 서독으로 귀순한 수는 해마다 평균 20만에 이르렀고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며 서독행을 원하는 동독인들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도 자유를 찾아 떠나는 동독인들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물론 양적으로 탈출자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지만, 서독으로의 탈출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이웃 사회주의 국가 주재 서독대사관을 찾는 것이었다.

1984년 4월 6일에는 35명의 동독인들이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에 잠입하였다. 서독 정부는 이들을 모두 서독으로 받아들였고, 이러한 방법으로의 탈출이 이어졌다. 그리고 6월 25일에는 동독 청년 55명이 동베를린 주재 서독대표부에 진입하여 서독행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독 정부는 서독대표부를 잠정 폐쇄하였으며, 동독 공산당에 대한 동독인의 태도도 점점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월 영국의 팝 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연주회가 브란덴부르크 서베를린 지역에서 열리게 되었을 때에는 수많은 동독 청년들이 서베를린 연주회장으로 몰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 무력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동독 청년들의 불만이 정치적 이슈를 띄게 되었다. 1988년도에는 동독 공산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다 조직적인 반공시위가 일어났다. 공식행사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입크네히트 (Rosa Luxemburg-Liebknecht Demonstration) 기념시위대에 가담하여 호네커 정부를 비판하는가 하면, 소련과 동구권의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공산정권에 반기를 든 동독 청년들의 시위도 점점 세력화 되어 갔다. 전통 야당도시 라이프찌히에서는 월요일마다 시위대가 일어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월요데모는 점점 조직화, 대형화되어 갔다. '우리가 국민이다!' 라는 구호는 어느 새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구호로 바뀌었으며, 이 사건은 더 이상 동독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탈출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바르샤바, 프라하 소재 서독대사관에는 자유를 요구하는 동독인들로 꽉 차 있었다.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은 1989년 9월 30일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에 진입하여 서독으로의 이주를 요구하고 있던 3,500여 명의 동독 탈출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약속하였고, 이 약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겐셔 장관은 이들을 서독으로 수송할 특별열차가 제삼국이 아니라 동독영토를 경유하여 서독에 도착할 것을 동독에 요구하였고, 이 요구 또한 동독정부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부 동독인들은 달리는 열차에 뛰어오르기도 하였다. 전 세계 언론이 이 사건에 집중하였고, 국경없는 보도들은 동독사회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어 개혁을 요구하는 동독인들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동독 탈출자들이 서독으로 이주하기 위한 경유지가 되어 갔고, 서독 정부는 모든 탈출자들을 안전하게 서독으로 수송하였다. 동독정부는 폴란드 국경을 봉쇄하고 잇따라 다른 동구권 국가들의 국경을 통제하며 동독인들의 이동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절정에 달한 동독인의 개혁의지와 자유에 대한 갈망은 어떠한 물리적 통제로도 막을 수 없었다.



통일, 참과 자유, 인권의 승리


- "폴란드 민족은 50년 전에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최대 피해자들입니다. .....독일 민족은 가해자입니다. 가해자인 우리가 폴란드 국경을 재론하며 과거 영토에 대한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독이 국제적으로 다시 신뢰를 회복하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참과 진리 앞에 겸손한 정치인의 진정한 용기로 대변되는 서독 외교의 승리이기도 하다.


동서독 통일은 20세기 인류 역사가 만들어낸 가장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걸작품으로부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우선 참과 진리, 그리고 보편적 가치에 충실한 서독의 대외정책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참과 진리의 편에 서서 최초로 대외관계를 발전시킨 정치인은 신 동방정책을 과감히 펼친 빌리 브란트 수상이다. 그의 대외정책은 히틀러 독재체제 하에서 억압받아 왔던 타민족에 대한 용서를 그 시작으로 하고 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켰던 거만한 독일의 최고 정치지도자가 지난 1970년 약소국 폴란드를 방문한 자리에서 바르샤바 나치 희생자 묘역에 무릎을 꿇고 어두운 과거 역사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겐셔 외무장관은 유엔총회에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하였고, 이 기회를 통하여 서독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서독 정부가 이를 통해 가장 핵심적으로 전달한 사항은 동독사태로 인해 주변의 어떠한 나라도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폴란드를 향한 연설은 전범으로서의 독일에 대한 솔직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독일민족의 책임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폴란드 민족은 50년 전에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최대 피해자들입니다. 폴란드 국민은 이제는 안전한 국경을 보장받고, 그 안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독일 민족은 가해자입니다. 가해자인 우리가 폴란드 국경을 재론하며 과거 영토에 대한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한 슬픈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폴란드와 함께 미래의 보다 나은 유럽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현 국경에 대한 보장은 유럽의 평화공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독이 국제적으로 다시 신뢰를 회복하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참과 진리 앞에 겸손한 정치인의 진정한 용기로 대변되는 서독 외교의 승리이기도 하다.

지난 89년 서독이 주변 강대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의 동의를 얻어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인권과 자유라고 하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운 국가운영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독 탈출이 대규모로 진행되고, 동독 내부에서 반공산 투쟁이 점점 조직화되는 상황 에서 서독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당시의 서독 정부는 동독 탈출 사태를 결코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인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서독 정부는 같은 동포로서 억압과 결핍의 고통 속에서 동독을 탈출한 동포들에게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정치적 이해가 아니라 진리에 충실


동독에서 내버리다시피 한 병약자와 노인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애매하게 조작된 정치범들은 수천만 원씩의 비용을 들여 서독으로 이주시킨 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일주일 전에 장벽을 넘다 사살된 청년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던 서독사회, 이것들이야말로 서독 사회가 참과 진리 편에 섰다는 증거들이다.

서독정부는 지난 1963년부터 년 2억5천만 DM(한화 약 1천3백만 원)의 예산을 책정해 통일이 되기까지 무려 3만 3천여 명의 정치범들을 한사람 당 평균 9만 DM를 지불하고 서독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미소 강대국에는 패전국이요,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이웃 국가들에는 전범자이자 가해자인 서독이 아무도 동의할 수 없었던 통일을 이루어낸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참, 선, 인권, 자유와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에 충실했던 서독 정부의 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I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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