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 역사왜곡, 그리고 통일: 홀로코스트 추모관
2005년 5월 10일 나치전범에 대한 연합국의 승전기념일이 지난 직후 나치의 본거지였던 베를린에는 뜻밖의 행사가 거행됐다. 17년 동안 지리하게 논쟁을 거듭하던 나치 대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 추모관에 대한 제막식이 열렸다. 서방의 기자들이 대거 참석했고 일본의 역사왜곡과 대비되어 국내외적으로 많은 반응과 관심이 모아졌다.
홀로코스트 추모관 건립은 지난 1989년 한 시민단체에 의해 제안되었고 오랜 논쟁을 거쳐 10년이 지난 1999년 연방의회에서 의결됐다. 국제인권단체들은 홀로코스트 추모관 설립이 연방의회에서 의결된 다음 해인 2000년 봄 나치의 패배를 기념하고 추모관 건립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반세기 나치의 만행을 막지 못한 것이 인류의 수치였다. 이제 이 나치의 범죄를 규탄하는 이 자리에 오늘날 현존하는 나치에 버금가는 북한 김정일의 인권유린에 침묵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독일은 통일 후 여러 통일 후유증을 겪고 있다. 급작스런 통일로 충분한 준비없이 즉흥적인 정책들이 만들어낸 정책적 오류로 인한 것도 있지만 독일민족의 역사 속에 흐르는 배타적 민족성에 기인한 것도 있다. 네오 나치가 그것인데 통일 후 호이어스베르더(Hoyerswerder), 로슈톡(Rostock) 등 작센을 중심으로한 동독지역으로 부터 강하게 되살아나는 스킨헤즈들의 등장이다.
되살아나는 네오나치의 망령에 독일은 다시 한번 분명하게 “No"를 외치고 있다. 과거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Gestapo) 건물이 있던 그 자리에 추모관을 세우고 독일 역사에 다시는 나치와 같은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일부 극우파들로 흘러나왔던 주장에 쐐기를 박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제 나치가 멸망한 지 반세기가 흘렀고 독일은 이미 반세기 동안 나치 범죄에 대한 충분한 댓가를 치렀다고 하는 주장을 암암리에 독일사회에 전파해왔다. 분단이야말로 나치 범죄에 대한 죄값이었고 이제 그 분단도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나치의 과거역사에 볼모가 되지 말자는 논리였다.
추모관 형태와 의미
2005년 5월 10일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 중심가에 호르스트 쾰러(Horst Koehler) 대통령, 게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eder) 총리, 볼프강 티에르제(Wolfgang Tierse) 연합의회 의장을 비롯해 연방각료들이 모두 모였다. 히틀러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영원히 잊지 말자고 하는 추모비에 대한 제막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총19,000 평방미터에 2,711개의 콘크리트 기둥의 추모비로 구성되어 있다. 사면이 개방되어 있고 입구도 출구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 추모비의 크기는 동일하지만 그 높이는 모두 다르다. 0.2미터의 추모비에서 부터 무려 4미터에 달하는 추모비도 있다. 그리고 추모관 지하에는 당시 나치의 만행과 폭행, 유대인들의 수용소 등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독일 정부는 이 시설을 위해 2천750만 유로를 들였다.
이제 베를린은 국가원수들의 방문해 헌화하는 장소가 되었고 학생들의 수학여행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또한 많은 관광객들이 베를린 중심에 놓여있는 2,711개의 추모비를 보기 위해 베를린을 찾고 있다.
추모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지난 1989년의 일이다. 당시 일간지 프랑크후르트 룬드샤우(Frankfurter Rundschau) 1월 30일자에는 시민단체인 ‘전망 베를린 Perspektive Berlin’이 베를린시, 연방 그리고 각 주 정부를 수신자로 한 다음과 같은 호소문이 실렸다.
“나치가 권력을 거머쥐고 유럽의 유대인을 학살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독일 땅, 범죄자의 나라 어디에도 오늘날까지 이런 민족학살과 희생자를 상기시키는 어떤 추모관도 없다.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수백만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해 베를린에 대규모 추모관을 설립할 것을 요구한다. 나치 제국의 수도에 위치했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있었던 바로 그 위치에 추모관을 설립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이런 추모관의 설립이야 말로 동서독 독일인 모두의 의무이다.“
이 호소문에는 빌리 브란트 전총리, 양철북의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 오토 쉴리, 가수 우도 린덴베르그, 노동지도자 프랑크 슈타인퀼러 등 26명의 정치인과 각계 지도자들이 서명했다. 시민단체의 호소는 10년이 지난 1999년 그 첫결실을 맺었다. 연방의회가 홀로코스트 설립을 의결하였고 이제 6년만에 추모관이 완공된 것이다. 게슈타포 본부가 있던 자리이며 히틀러의 지하벙커가 있던 곳에서 불과 100미터 떨어진 곳이다.
추모관 아이디어를 최초로 제공한 사람은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예켈이었다. 시민단체 ‘전망 베를린’의 레아 로슈(Lea Rosh)는 예켈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기기 위해 지난 17년간 투쟁을 해왔고 2005년 그 결실이 맺어진 것이다. 로슈는 제막식 행사에서 예켈의 아이디어에 감사를 전했고 통일총리 헬무트 콜의 후원에 특별히 감사함을 밝혔다.
홀로코스트 추모비와 역사적 교훈
: “분단은 나치범죄의 죄값, 통일이 됐으니 죄값은 다 치른 셈”(?)
통일을 이룬 후 15년만에 만들어져 세상에 공개된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전쟁을 일으키고 6백만의 유대인과 수백만 민간인들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물론이고 전인류를 향해 독재권력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볼프강 티에르제 연방의회 의장은 기념사에서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과거 나치 만행을 의식 속에 깨어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 의미를 되새겼으며 쾰러 대통령은 나치 멸망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사회 일각에서 수면 위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죄값을 치렀다”는 여론을 경계하기 위해서도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통일도 됐으니 과거반성은 끝났다고 하는 잊혀져 가는 역사반성을 영원히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독일 정치지도자의 과거반성과 역사의식은 일본의 역사왜곡과 맞물며 국내외에 적지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승전기념행사에 참석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9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일본은 전쟁에 대해 충분히 반성했고 할 만큼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데어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의 논설위원인 클레멘스 베르긴은 10일 파이낸셜 타임스에 게재한 ‘역사 문제에 있어 독일이 일본에 주는 교훈’이란 칼럼을 통해 “일본은 이웃 국가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과거에 대한 더욱 철저한 평가가 필요하다”며 “아시아에서의 긴장완화는 일본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왜곡은 일본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 역시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소수민족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고구려사를 중국 변방민족의 역사로 왜곡하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 비해 독일의 과거 역사에 대한 참회는 남다르다. 나치의 역사가 이미 반세기를 넘겼고 나치 범죄에 대한 죄값인 분단도 이제는 극복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기회있을 때마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나치의 유산인 스킨헤즈에 대해 독일사회는 다시 한번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역사를 미화하고 왜곡해서라도 남의 땅을 빼앗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중국과 일본과는 판이하다.
2,711개의 추모비로 구성된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어느 곳에도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놓지 않았다. 이에 대해 추모관을 설계한 미국의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은 자신은 나치 희생자들의 공동묘지를 건립하지 않았고 이 추모관은 희생자들의 희망이고 이곳을 방문한 방문객들은 2,711개의 추모비로 부터 희생자들의 절규를 듣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0.2 미터의 낮은 추모비에서 부터 무려 4미터에 달하는 추모비가 희생자들의 다양한 고통과 절규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5.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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